2012년 7월 16일 월요일

말로의 '인간의 조건' 중

모든 인간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세계, 영원의 세계, 낮은 또다시 이들, 썩어빠진 기와지붕 위로 돌아올 것인가?

보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 가슴속에 있는 것을 말로 형언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검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물결은 침묵 속에서 흔들렸다. 사람 음성에 잉어가 잠을 깬 모양이었다.

"부상자의 반은 죽었겠지. 고통이란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법이야.  그런데 대개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거든."

인간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육체는 눈에 익은 것이 갑자기 변모하였을 때의, 그 비통한 신비감 - 벙어리나 장님, 미치광이들이 갖고 있는 그 신비감 - 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자기 생명도 목구멍으로 듣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의 생명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는 고독이 있다. 고독은 무수한 인간들의 배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마치 희망과 증오로 충만한 황량한 도시를 뒤덮고 있는 이 깊은 밤의 배후에 커다란 원시의 밤이 존재하듯이.
'그런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 자신에 대해서, 목구멍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일종의 절대적인 긍정이다. 미치광이의 긍정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나라는 존재는 결국 내가 한 일만이 전부인 것이다.' (중략) 포옹은 사랑에 의해서 남녀를 결속시켜 고독을 잊게 해주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결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이 완전한 고독, 그가 기요에게 품고 있는 그 애정조차도 그를 여기에서 해방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인간 속에서 피난처를 발견할 수는 없다 해도 자기를 해방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편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곳에서는 관대한 무관심이 모든 것을 녹이고 있었다.
(중략) 두 눈을 감고, 흔들리지 않는 커다란 날개에 실려가고 있는 노인 지조르는 자기의 고독을 조용히 관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성한 것을 추구해가는 쓸쓸한 마음이었다. 동시에 죽음의 심연을 부드럽게 덮고 있는 저 조용한 물결은 무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그들은 모두 죽음을 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문제는 개죽음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마치 밤이 그들을 그곳에 가둔 것처럼 적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이 새벽이, 이번에는 그들을 거기서 놓아주는 것같이 여겨졌다. 지붕 위의 새벽빛이 반사되어 파르스름한 잿빛으로 변했다. 전투가 그친 시간 위에서 빛이 밤의 커다란 덩어리를 흡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만, 인간 앞에 검고 네모지 그림자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그림자도 차차 짧아져갔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앞으로 여기서 죽어갈 사람들오 잊어버릴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다. 그림자는 오늘도 영원한 움직임을 계속하면서 줄어들어갔다. 그것이 오늘은 일종의 처참할 정도로 장엄함을 띠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두 번 다시 그것을 볼 수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오고 있는 저 사나이는 돈 때문에 저 위층에서 아직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러 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상, 어떤 신념 때문일 것이다. 지금 철조망 앞에 서 있는 저 그림자, 에멜리크는 그 그림자의 사상에까지 증오를 느꼈다. 이 행운의 종족은 그들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기네들이 정당하다고 믿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지배하고 있는 인간 앞에서 누구나가 느끼는 그 굴욕감을 욕지기가 날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채찍을 쥔 저 더러운 그림자에 대해서는 무력했다.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야 마치 권력을 쥐기만 하면 거의 모든 인간을 개짐승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어릴 때 꿈에 본 갑각류나 거대한 곤충처럼 왠지 마음을 못 놓게 하는 존재들, 창살 저편에서 우글거리고 있는 저 희미한 존재들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한 고독과 굴욕이었다.

아니, 자기 자신에게 벗어나 남의 눈에 지금까지와 다른 인생을 사는 인간처럼 비치기 위해서는 한 벌의 옷으로 충분하다는 것은 이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통과 부조리 속에서, 혹은 굴욕의 한가운데서 일하는 인간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사람들은 이곳에 있는 이와 같은 수형자들을 생각할 것이다. 마치 신자들이 기도를 드리듯이. 그리고 벌써 거리에서는 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이미 죽어버린 것처럼 여기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중략) 죽음을 각오할 수 없는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혼자만이 죽는 것이 아닐 때, 사람은 쉽게 죽을 수 있는 법이다. 이와 같이 동지의 떨리는 말소리로 가득 찬 죽음,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순교자로 발견하게 될 패배자의 집합, 황금전설을 만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설! 이미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그가 어떻게 생명을 바치 인간의 중얼거림을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중얼거림은 죽어가는 자들에게는 인간의 씩씩한 마음이야말로 영혼의 세계 몿지않은 은신처라고 부르짖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자존심이 강해 순응주의자도 위선자도 되지 못했다. 위대한 개인주의란 위선의 비료를 받지 않으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의 정신은 인간을 영원의 세계에 놓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에 대한 의식은 고뇌일 수밖에 없다.
(중략) '인간은 모두 미치광이다.' 하고 그는 여전히 명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 광증과 세계를 결부시키기 위한 인생의 노력이 인간의 운명이 아니라면, 인간의 운명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하늘 높이 뜬 가벼운 구름이 어두운 소나무 위로 흘러가다가 차츰 하늘에 녹아들었다. 그는 거기에 흐르고 있는 구름 한 조각이 - 바로 그것이 - 그가 일찍이 알던 혹은 사랑한, 그리고 지금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은 살과 피와 고뇌로 두껍고 무겁다. 무릇 죽는 것이 다 그러하듯 인간은 영원히 자기 자신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피조차도, 살조차도, 고뇌조차도, 그리고 죽음까지도 저 높은 광명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린다. 

- 중국 공산주의의 저항이 시작되었을 때 장제스의 탄압에 대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인간 개인의 생각과 의식을 날카롭게 짚어낸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사상보다는 사상속에서 행동하는 인간에 대해 촛점을 맞추고 있다. 공산주의 세력인 첸, 기요, 카토프, 에멜리크 등은 사상에 얽매여 있기 보다는 동지애, 인간애 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투쟁한다. 각각의 개인적 생각과 삶속에서 가장 인간다운 선택을 하는 그들의 참담한 패배. 그것은 과연 패배인가? 죽음으로 끝나는, 혹은 죽음으로 끝날 것이 당연히 예견되어져 있는, 그들의 삶은 어리석음인지 위대함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들은 인간의 고귀한 본질, 의리, 우정, 용기, 자존심 등, 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의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엇을 가슴 속에 남기고 있다.
  역사를 통해 많은 사상과 신념에 의해 인간들이 잔혹하게 희생되어 온 것을 본다. 그 사상과 신념의 중심에서 생기는 권력에 의해 반대편의 인간들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자행하는 인간이하의 존재로 변하는 것도 본다. 그러나, 시간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사상과 신념의 무용함과 무상함 또한 보아왔다. 그럼에도 같은 잔악함과 그 잔악함에 대한 대항이 계속 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인가? 위대함인가?
  말로는 여러 극중 인물을 통해, 투쟁하는 인간, 회색지대에 머무는 인간, 회피하는 인간을 모두  보여준다. 어떠한 것이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고귀한 인간적 본질들(우정, 용기, 의리, 자존심)은 모두 세상적 의미에서 패배로 끝난다. 그러나, 고통과 죽음, 부조리 앞에서, 인간의 조건(최소한 인간의 존엄)을 사수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진실로 안타깝고도 위대하다. 이를 극히 명확하고도 아름다운 서술로 이끌어 낸 말로의 시각. 주인공들이 한동안 가슴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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