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6일 월요일

카뮈의 '여행일기' 중

미국  1946년 3월~5월

인생은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것이 다 동원되고 있는 이 나라에서 학생들은 무언가 결핍을 느끼고 있다. 그들의 커다란 노력은 비장하다. 그러나 비극성이란 일단 바라본 후에 떨쳐버려야 할 것이지 보기도 전에 버려서는 안 된다.

저녁에 서커스. 네 곳에 마련된 곡예 공간들. 모두가 동시에 묘기를 보인다. 그런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투치의 말 : 이곳에서 인간 관계가 아주 쉬운 것은 인간 관계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겉껍질만 남습니다. 예의상, 그리고 게을러서.

옳은 자는 결코 아무도 죽인 적이 없는 자다. 그러니 그것은 신일 리 없다.

어떤 한 사내가 사업상의 여행 중에 별다른 생각 없이 어떤 자연 그대로인 고장의 외따로 떨어진 여인숙에 든다. 그런데 거기서 그 자연의 침묵, 아무 치장 없는 소박한 방,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 등이 그로 하여금 영원히 이곳에 머물며 과거의 자기 삶이었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그리하여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별하지 말고 지내기로 결심하게 한다.

이 대륙에 온 이후 처음으로 아름다움과 진정한 위대함의 실감 나는 인상을 받다. 퀘벡에 대해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어떤 힘에 떠밀려 이 고독 속으로 찾아와서 투쟁했던 인간들의 그 과거에 대해서 나는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중략) 내가 말하고 싶은 단 한 가지를 나는 지금까지 말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아마도 영원히 그것을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뉴욕의 비. 끊임없이 내리며 모든 것을 씻어낸다. 회색의 안개속에서 마천루들은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의 거대한 관들처럼 희끄무레하게 서 있다. 빗속에서 이 관들의 밑받침이 흔들거리는 것이 보인다.
버림받았다는 끔찍한 느낌.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 품에 꽉 껴안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방어되지 못할 것만 같다. 

돌아오는 여행길은 길기만 하다. 내 마음의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순간들은 바다 위에 내리는 저녁들과, 황혼에서 달이 뜰 때로 옮겨 가는 시간이다.

이곳 계층의 끔찍스러운 범속함.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나를 에워쌀 수 있는 범속함 때문에 괴로워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바다를 지켜보리라.

내가 아직도 이토록 상처 받기 쉽다는 것을 느끼는 슬픔. 25년 후면 나는 57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작품을 쓰고, 내가 찾는 것을 발견해야 할 25년. 그런 다음에는 노년과 죽음. 나는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작은 유혹들에 넘어가고 헛된 수다와 무익한 방황에 시간을 허비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 속의 두세 가지를 극복했다. 그러나 내게 그렇게도 필요한 저 우월감을 가지기에는 아직 멀었다.

나는 늘, 인간들에 대한 강한 관심과 부산하게 움직이고 싶은 허영, 그리고 이 망각의 바다에도 손색이 없고 죽음의 환희와도 같은 이 무한한 침묵에도 손색이 없는 나 자신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찢어져 있었다.


남아메리카  1949년 6월~8월

이 무한한 고독이 지금은 내 마음을 느긋하게 해준다. 비록 이 바다가 오늘은 이 세상의 모든 눈물을 다 출렁이게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지만. 나는 내 선실로 되돌아와서 지금 이 글을 쓴다 - 저녁마다 그렇게 하고 싶다. (중략) 내가 버려둔 채 하지 못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지만 그래도 나는 잠이 들고 싶다.

바다는 표면만 빛을 받고 있지만 바다의 깊은 어둠이 느껴진다. 바다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사랑한다! 삶의 부름인 동시에 죽음에의 초대.

그리고 나는 그 무엇보다도 이 좁고 단정한 선실, 이 딱딱한 침대, 그리고 이 헐벗음이 좋다. 아니면 이 군더더기 없는 고독 혹은 사랑의 폭풍. 그 밖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내 관심을 끌지 못한다. 뭐 잊어버린 건 없는가? 없는 것 같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앞에 두고 하루를 마감한다. (중략) 하늘과 물은 끝이 없다. 여기서는 슬픔도 얼마나 멋진 동반자를 가지는가!

아침 바다: 생성들의 거대한 양어장 - 무겁고 펄쩍펄쩍 뛰는 - 또한 지글지글 끓는 - 비늘이 돋은 - 끈적끈적한 - 신선한 거품에 뒤덮인.

바다는 분해되어가는 것들의 금속성 광채와 함께 거대하게 부어오른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바람 쐬는 갑판을 네 바퀴나 뒤따라 돌면서 그 사람을 관찰해보니 그는 단 한 번도 바다를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혼자이며 길을 잃었다는 것을 느끼다가 마침내 황홀해지는가 하면 얼굴을 알 수 없는 이 미래와 내가 사랑하는 이 위대함 앞에서 내 힘이 점점 다시 솟아나는 것을 느낀다.

바다는 거칠다. 하늘은 꽉 막혀 있다.

약간 일했고, 많이 어슬렁거렸다.

지금 이 순간의 내 관심이 실제로 인간들을 향해 있지 않고 바다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내게 습관 되지 않은 내 속의 이 깊은 슬픔은 거기서 오는 것.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배 전체가 침묵을 지키고 서쪽 뱃전의 갑판 위에 빽빽하게 모여 있는 선객들마저 일상의 비참과 존재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 듯 침묵으로 돌아갈 맘큼.

바다를 앞에 두고 오래 머문다. 아무리 노력하고 이리저리 다져보아도 이 슬픔을, 더 이상 이해할 수조차 없는 이 슬픔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저녁은 서늘하고 감미롭다. 이제 이틀 후면 도착하게 된다. (중략) 또다시 살고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는 것. 사람들, 얼굴들, 내가 해야 할 역할, 아마 내가 지금 그것들에 대하여 느끼고 있는 것 이상의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오후에 수백 미터 아래의 바닷물 속에서 시커먼 거대한 동물 한 마리가 물 표면까지 솟아 올라와서는 파도를 몇 번 타너니 먼지같은 물방울들을 두 줄기 내뿜는다. 내 곁의 바의 보이가 고래라고 알려준다. 그 몸집의 크기, 헤엄쳐나가는 무서운 힘, 고독함 짐승의 모습......등을 보면 그런 것 같지만 여전히 잘 믿어지지 않는다.

이런 교통질서의 혼란과 무질서는 단 하나의 법칙, 즉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일 먼저 도착한다는 법칙으로만 보상이 된다.

나는 인간의 신들보다 밤과 하늘이 훨씬 더 좋다.

나는 몇몇의 진실한 눈들을 보았다.

이런 날씨에는 두 번 젖는다. 우선 비에, 그 다음에는 자기가 흘린 땀에.

그러나 광대한 공간들 특유의 슬픔을 가진 이 감당할 수 없이 넓은 땅 위에서 삶은 바로 그 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삶으로 파고들자면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잊혀진 이 구석에서 나를 보게 된 것에 놀라워들 했다.

나는 여러 시간 동안 다시 한번 이 단조로운 자연과 이 광막한 공간을 바라본다.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보는 이의 정신에 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런 경치다. 이 고장에서는 계절들이 서로서로 뒤섞여 분간하기 어려워지고 뒤엉킨 식물들은 형체를 규정할 수 없게 되고 피들이 어찌나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는지 영혼이 그 한계를 잃게 된다.

내 관심은 떠나는 것, 그리고 다 끝내는 것, 마침내 모든 것을 다 끝내버리는 것이다.

지독한 서글픔과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느낌.


- 작가의 여행, 작가의 눈으로 본 여행. 물론 작가의 느낌이 그대로 표현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의 공감.
아마도 이 두 여행을 신문기사로 보았다면, 유명작가가 되어 강연을 두 대륙으로 순차적으로 떠나는 카뮈의 여행이 성공의 한 단편 쯤으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손으로 기록된 여행일기는 오히려, 카뮈의 고독과 갈등, 작가로서의 시선, 사람과 함께이면서도 완전히 혼자일 수 있는 공간, 장거리의 선상 여행에서의 바다에 대한 애정과 묘사 등으로 그저 일반인이 혼자 떠나는 여행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마치 내가 다시 같은 여정을 떠난다 하더라도 그의 손에 의해 기록된 그 묘사와 나의 느낌이 다르지 않게 느껴질 듯.
원하는 것을 써내고 싶은 작가의 갈망이 광대한 자연과 낯설은 도시의 풍경에 녹아들어가 열망과 고독을 가슴에 불러일으키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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