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8일 수요일

카뮈의 '시지프 신화' 중 1

부조리의 추론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멜로드라마에서처럼 하나의 고백이다.  그것은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이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을 용의가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한한다.

비극적인 일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결국 그 사람됨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가지는 애착에는 이 세상의 모든 비참보다도 더 강한 그 무엇이 있다. 육체가 내리는 판단도 정신이 내리는 판단 못지않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육체는 소멸의 위협과 마주치면 뒤로 물러선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보다 살아가는 습관을 먼저 배워서 익힌다.

이 시론의 제3의 치명적인 회피는 다름 아닌 희망이다. 내세의 삶(우리가 그 삶을 얻을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에 대한 희망, 혹은 삶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거창한 관념, 삶을 초월하고 그 삶을 승화시키며 삶에 어떤 의미를 주며 삶을 배반하게 되는 어떤 거창한 관념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 말이다.

논리적이 되기는 언제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궁극에까지 논리적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중략) 과연 죽음에 이를 정도의 논리란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쓸리는 일 없이, 자명함이라는 단 하나의 빛 속에서, 내가 여기 그 기원을 지적하고 있는 추론을 진행시킴으로써만 그에 대한 답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천에 옮긴 것은 가장 순순한 반항의 형태인 사유의 자살이었다. 참다운 노력이란 포기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그곳에 살아 남아 버티면서 멀고 구석진 고장에 서식하는 괴이한 식물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일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건대, 단순한 '관심'이 모든 것의 기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중략)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한 내일을. 이러한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

그보다 한 단계 내려가면 나타나는 것이 낯설음이다. 즉, 세계가 '두껍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하나의 돌이 얼마나 낯선 것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완강하게 닫혀 있는 것인가를, 그리고 자연이, 하나의 풍경이 우리를 어느 만큼 고집스럽게 부정할 수 있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중략) 한동안 우리는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 세게 동안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세계에 미리부터 부여해놓은 모습과 윤관만을 이해해왔기 때문이며, 이제부터는 그러한 인위적인 수단을 행사할 힘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중략)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갑자기 우리를 그토록 고독하게 만드는 것을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그때는 오지 않았다. 단 하나의 사실만 말해두자. 즉 세계의 낯설음과 두꺼움,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마치 죽음 같은 것을 '전연 몰랐다'는 듯이 살고 있는 것은 정녕 놀라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나는 도대체 누구에 대해서, 무엇에 대해서 '그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 속의 이 마음, 나는 이 마음을 느낄 수 있으며 이것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이 세계, 나는 이 세계를 만져볼 수 있으며 이것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나의 모든 지식은 여기서 멈춘다. 그밖의 것으 조작이다. 왜냐하면, 가령 나 잔시도 확신하고 있는 터인 자아를 막상 포착해보거나 정의하고 요약해보려고 들면, 이 자아는 그만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물에 불과한 것이 되니 말이다. (중략) 내 것인 이 마음 자체조차 나에게 영원히 정의될 수 없는 것으로 머물 것이다. 내가 나의 존재에 대하여 갖는 확신과 내가 그 확신에 부여하려는 내용 사이에 가로놓인 단층은 결코 메워질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나는 나 자신에 게 이방인일 것이다. 심리학에 있어서든 논리학에 있어서든, 여러 가지 진리들은 있으나 유일한 진리는 없다.

또 다른 예로, 여기 나무들이 있다. 나는 그 꺼칠꺼칠한 촉감이나 물기를 알고 있으며 그 맛을 느낀다. 여기 이 풀잎과 별들의 냄새, 밤, 마음이 느긋해지는 저녁나절들, 내가 이토록 저력과 힘을 실감하는 터인 이 세계의 존재를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상의 모든 지식은, 이 세계가 나의 것이라고 확신시켜줄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제동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이렇듯 나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쳐줄 것 같던 과학은 가설로 끝나고, 저 명증성은 비유속으로 가라앉고 저 불확실성은 예술작품으로 낙착되어버린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 많은 노력을 했던가? 차라리 저 산들의 부드러운 곡선과 어수선한 가슴 위에 얹혀 놓이는 저녁의 손길이 세계에 대하여 내게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중략) 만일 내가 과학을 통하여 제반 현상들을 파악하고 열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세계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내가 이 세계의 들어가고 나온 기복을 손가락으로 남김없이 다 더듬어본 후라 할지라도 역시 내가 더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중략) 바란다는 것, 그것은 곧 온갖 역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태평함, 마음의 졸음 또는 치명적인 체념이 주는 이 중독된 평화가 생겨날 수 밖에 없도록 모든 것이 다 골고루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조건을 냉철하게 고찰한 다음, 실존은 굴욕적인 것이라고 단언한다. (중략) 그 역시, 잠들어서는 안 되며 마지막 다할 때까지 깨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이 부조리한 세계 안에서 버티면서, 소멸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세계의 성격을 밝혀낸다. 그는 폐허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얻어내거나 아니면 무, 둘 중의 하나를 원한다. (중략) 그러나 열망뿐인 사람들은,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고 모두가 혼돈이며, 인간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스스로의 명증성과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벽에 대한 명확한 인식뿐임을 공언한다.
(중략)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바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꼭 매달려야 한다. 한 일생의 모든 귀결이 송두리째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숨막히는 하늘 아래서 살게 되면 거기서 빠져나오든가 아니면 그곳에 버티고 있든가 양자택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전자의 경우, 어떻게 하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를, 그리고 후자의 경우, 무엇 때문에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를 알아내는 일이다.

기독교란 스캔들이다. 키에르 케고르가 한결같이 요구하는 것은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요구했던 제3의 희생, 신이 가장 기뻐하시는 '이지의 희생'이다.

적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는 아무것도 세우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오로지 그것만 가지고도 살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중략) 다만 나는 지성이 명석함을 잃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중간적인 길을 고수하고자 할 따름이다. 바로 이 점이 오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포기해야만 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문제는 부조리의 상태, 그 안에서 사는 일이다. (중략)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는 것은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도대체 삶이란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당나귀처럼 환상의 장미꽃을 먹고 살아가야 한다면, 부조리의 정신을 단념하고 허위에 몸을 내맡기기보다는 차라리 두려움 없이 '절망'이라는 키에르케고르이 대답을 선택할 것이다.

사실상 어느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의지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의 추론은 추론을 유발시킨 자명함 자체에 충실하고자 원한다. 그 자명함이란 곧 부조리이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주는 세계 사이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그 양자를 한데 비끄러매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중략)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열과 더불어 살고 생각하는 것이며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다. 자명한 것을 은폐한다거나 방정식의 한쪽 항을 부인함으로써 부조리 자체를 제거해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로 살아갈 수 있는가, 아니면 논리는 부조리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다고 명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내가 관심있는 것은 철학적 자살이 아니라 그냥 자살 그 자체다. (중략) 후설은 '익히 잘 알고 있고 편안한 생존 조건 속에서 살고 생각하는 고질적인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에 순응하라고 말한다. (중략) 오히려 진정한 위험은 비약하기 바로 전의 미묘한 순간 속에 있다. 현기증나는 순간의 모서리 위에서 몸을 지탱할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성실성이다.

나는 이 세계가 그 자체를 초월하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어떤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며 지금 나로서는 그것을 인식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조건을 벗어나는 의미가 존재한 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오직 인간적인 언어로 된 것만을 이해할 따름이다.

이토록 보잘 것 없는 이성, 바로 이것이 나를 모든 창조물에 대립시켜놓는 것이다. 나는 그 이성을 펜으로 확 지워버리듯이 부정해버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마땅히 견지해야 한다. (중략) 현재라는 이름의 지옥, 이것은 마침내 그의 왕국일 수밖에 없다. 모든 문제들은 또다시 서슬이 푸른 날을 세운다. (중략) 아무것도 해결되 것은 없다. 그러나 모든 모습이 달라졌다. 이제 죽을 것인가, 비약을 통해서 문제를 모면할 것인가, 아니면 제 분수에 맞는 관념과 형상들의 집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부조리의 비통하고도 멋들어진 내기를 지탱해 나갈 것인가?

이리하여 그가 스스로에 요구하는 바는 '오로지' 자신이 아는 것만 가지고 살고, 실재하는 것으로써 자족하고, 확실치 않은 것이라면 아무것도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략) 즉 그는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한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부조리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던 눈길을 딴 데로 돌릴 때 죽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중략)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중략)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그러나 그런 확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한 채의 확인인 것이다.
(중략) 부조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생각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현기증나는 추락의 막바른 벼랑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바라보게 되는 저 한 가닥의 구두끈이다. 자살자의 반대, 이것은 다름 아닌 사형수이다.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한 생애의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반항은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편협하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과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광경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은 없을 것이다. 인간적 오만이 펼쳐 보이는 그 광경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평가절하하려고 제아무리 애써보아야 헛수고가 될 것이다. 정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이 규율, 불 속에서 통째로 단련해낸 이 의지, 그리고 정면대결에는 무엇인가 강력하고 비범한 것이 있다. (중략) 그런 이론들은 나 자신의 삶에서 짐을 덜어내준다. 그러나 이 짐은 나 혼자서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회의적 형이상학이 포기의 모럴과 손잡는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는 포기와는 정반대이다. 인간 가슴속에 깃들인, 환원될 수 없고 정열에 찬 모든 것이 다 함께 그의 삶에 맞서서 거부를 고무한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최극단의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매일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서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카뮈의 철학적 서술인 '시지프 신화'를 읽는 순간 그동안 머릿속을 맴돌며 말하지 못했던 질문과 생각, 그에 대한 완벽한 대답들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언제나 의문했던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 어렴풋이나마 줄기차게 믿어왔던 인간의 의지의 위대함 등이 같은 생각들로 그의 글 전반에 녹아있다.
  카뮈의 인간에 대한 긍정은 그 어떤 사상가나 철학자의 인간에 대한 긍정을 넘어선다. 그는 인간의 삶 자체에 절대적인 의미를, 특히 눈을 부릅뜨고 의식의 명료함을 잃지 않은 채 부조리에 대항하여 씩씩한 걸음을 옮기는 인간의 삶에 강력한 지지를 부여한다. 그 어떠한 삶도 (거짓 '희망'에 팔아버리거나 '의식'을 체념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위대한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에서의 삶 자체로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다.
  한 인간의 소멸은 세계의 소멸인 것이다.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한 세계는 존재를 잃는다. 반항, 자유, 열정을 간직하고 명료한 의식으로 살아갈 의미를 카뮈는 우리에게 안겨준다. 너무도 반갑고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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