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5일 수요일

포그너의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중

듀이 델은 천천히 일어선다. 그러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본다. 베개 위에 놓인 얼굴은 빛바랜 청동 주상 같고, 오로지 손만이 생명을 간직한 것 같다. 무기력하나 뭔가 삐뚤어지고 꼬부라진 느낌. 모든 게 소진되었으나 아직도 경계하는 그 무엇 때문에 피로, 기진맥진, 고통이 미처 떠나지 않은 듯하다. 어머니의 손은 마치 죽음 이후 영면의 현실성을 의심이라도 하듯이, 결코 지속되지 않을 정지의 순간, 즉 죽음을 경계하려는 듯하다.

죽은 바람은, 마찬가지로 죽은 듯한 어둠 속에서 죽은 땅을 훑고 지나간다. 눈이 미치는 곳보다 훨씬 멀리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땅은 죽은 채 누워 있다. 온기가 나를 감싸며 내 옷을 뚫고 속살에 닿는다. 내가 말했다. 당신은 걱정이 무엇인지도 몰라. 나도 모른다. 난 내가 걱정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걱정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울 줄도 모른다. 내가 울려고 애쓰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뜨거운 흙 속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젖은 씨앗이 된 것 같다.

이 아이는 슬픔과 걱정으로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아요.
난 다시 소름이 끼쳤다. 이따금 누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슬픔과 상흔에 대해서. 마치 번개처럼 언제 어디서나 닥칠 수 있는 것이다.

바더만
엄마는 물고기다.

죽은 후에도 자신의 존엄성을 애써 지키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한다. 아마도. 좋은 일을 했는데 그 대가가 죽은 아내와 함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라니. 정말 기분 나쁜 일이다. (중략) 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자이다. 사랑하는 자를 징벌하시는 하느님이시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벌을 좀 이상하게 내리시는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난 새 틀니를 해넣을 수가 있겠지. 그것이 그래도 위안이 된다. 정말로.

아버지께서 늘 하신던 말씀이 그냥 기억났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그도 단어를 가지고 있었다. 사랑, 그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랫동안 단어들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랑이란 단어 역시 다른 말과 마찬가지임을 알고 있었다. 그저 빈 곳을 메우기 위한 형태일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존심이나 공포라는 단어만큼이나, 사랑이란 말도 전혀 쓸모없게 될 것을 말이다.

바람도 소리도 없이 피곤하게 반복하는 지친 몸짓으로 되돌아가는 우리들의 삶. 밑도 끝도 없이 끓어오르는 오랜 욕망의 메아리. 해 질 녘 우리는 분노한다. 그러나 그 역시 인형들의 죽은 몸짓일 뿐.

그러나 누가 미치고 누가 정상인지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지, 난 확신할 수 없다.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갖가지 일을 저지른 후, 다시금 똑같은 공포와 놀라움으로 자신의 광기 어린 행위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 가난한 집의 부모들은 매우 잔인해 보인다. 그들의 슬픔은 막막하다. 그리고, 그들의 인내. 고통에 대한 인내. 고통스런 삶에 대한 놀라울만한 인내.
죽은 어머니와 이 어머니를 40 마일 떨어진 곳에 묻으러 가는 가족들. 그들과 주변인의 생각의 나열로 이루어진 소설. 이 소설은 매우 서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이고, 슬프면서도 아이러니컬한 웃음을 자아낼 때도 있다.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이 사명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불평도 없다. 인간이하로 보이는 남편조차도 (그는 아내가 죽은 뒤부터 틀니를 해 넣을 생각에 만족해한다.) 닥쳐오는 고난에 그 일을 수행한다.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은 각기 각자의 문제를 안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에 먼 길을 떠나면서도 그들의 머릿속엔 자신만의 문제가 떠나지 않는다. 또한 해결방법이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 문제, 그들 또한 그들의 어머니와 같이 죽음을 기다리며 살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를 묻고는, 그 부패한 시체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시체의 냄새와 함께 사라지는 것 같다.), 그 필사적으로 지켜온 시신을 묻고는, 이 가족을 매어줄 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남편은 아내를 매장할 삽을 빌리러 간 집의 여자를 새 아내로 맞고, 나머지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것은 슬픈 것인가. 삶이 단지 '살아감'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귀결될 때, 그 '살아감'조차 녹록치 않을 때, 인간의 가치는 어디서 찾아져야 하는가? 등장인물의 몇몇이 믿는 우스꽝스러운 신에 대한 믿음으로써? 아니면 죽은 어머니와 같이 죽음에 대한 기다림으로써?
포크너의 글은 절실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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