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0일 금요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 제3부, 제4부 -

제 3 부

우리는 결국 자신만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아끼는 자는 그것 때문에 병들어 버린다. (중략)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 순간을 보라. 이 순간이라는 문에서부터 영원한 하나의 길이 뒤로 뻗어 있다. 우리의 뒤에는 '영원'이 있는 것이다.

사소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고슴도치에게나 알맞은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덕이란 온순하게 길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늑대를 개로 길들이고, 인간 자체를인간의 가장 온순한 가축으로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중간'에 놓았다. 죽어 가는 칼잡이들로부터, 만족하고 있는 돼지로부터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데다 두었다." (중략)
그것이 비록 중용이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실은 '범용'이라는 것이다.

눈발을 머금고 침묵하는 겨울 하늘이여. 내 머리 위의 둥근 눈을 가진 백발의 얼굴이여! 오, 나의 영혼과 분방한 천상의 비유여!
그래서 나는 황금을 집어삼킨 사람처럼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나의 영혼을 찢지 못하도록?

어떤 사람의 고독은 병자로서의 도피지만, 또 어떤 사람의 고독은 병자로부터의 도망이다.

그대는 영혼이 누더기처럼 후줄근하게 널려 있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그들은 이 누더기로 신문을 만들기까지 한다.
(중략)
그들은 모두 서두르고 있지만, 자신이 어떤 이유로 서두르는지를 모른다. 그들은 서로 흥분시키지만 왜 그러는지조차 모른다.

여기서는 모든 피가 썩어 차디찬 거품을 일으키며 혈관을 돈다. (중략)
억눌려 일그러진 영혼, 여윈 가슴, 퀭한 눈, 끈적거리는 손가락이 널려 있는 이 도시에 침을 뱉어라. (중략)
그러나 나는 그대를 불평만 늘어놓는 나의 돼지라고 부르리라.

더이상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지나쳐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보와 대도시를 지나쳤다.

아, 오랫동안 용기와 오만을 지니고 있는 자는 언제나 아주 적다. (중략)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범속한 사람들이다. 진부하고 하찮은 존재들인 그들의 수는 너무나 많다. 이들은 모두 겁쟁이다. (중략)
이런 봄과 화려한 들판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정이 달랐다면 또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얼치기들이 모든 것을 더럽힌다.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졌다고 탄식할 필요가 있겠는가?

기도한다는 것은 치욕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대와 나에게만은 치욕이다.

혼자 버려지는 것과 고독은 아주 다른 것이다. (중략) 그리고 또 군중 속에서 그대는 항상 낯선 타향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그대를 사랑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대는 낯선 타향 사람이다.

나의 가장 큰 위험은 항상 친절하다는 것과 동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항상 위로받고 동정받기를 바란다. 
진실을 말하기를 억제하고, 낙서를 갈겨 쓰는 바보의 손과 마음을 가지고, 동정으로 인한 작은 거짓말을 하면서 나는 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왔다.
나는 변장을 한 채 그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동정심은 모든 자유로운 영혼들이 견디기 힘들 만큼 숨막히는 공기를 만든다. (중략)
내가 자신과 나의 재산을 감춰야 한다는 것, 나는 그것을 저 아래에서 배웠다. 그곳의 사람들은 정신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나도 기다리는 것을 배웠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배웠다. 내가 배운 것은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서는 것, 걷는 것, 뛰는 것, 기어오르는 것, 그리고 춤추는 것이었다.
(중략)
인식의 높은 돛대 위에 올라앉는 것은 적지 않은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략)
그리고 남에게 길을 물었을 때 나는 언제나 마음이 즐겁지 못했다. 길을 묻는 것은 내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는 길에게 묻고, 또 길 자체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선한 사람들은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그처럼 선량하다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이다.
(중략)
무모한 모험, 끊임없는 회의, 가혹한 부정, 혐오, 살아 있는 것들을 잘라버리는 용기들을 모으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진리는 그런 씨앗에서 싹트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인식은 죄의식과 함께 자라났다. 때려 부숴라. 그대, 인식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낡은 목록을 부숴 버려라!

과거는 할아버지로 끝나게 된다.

모든 천한 자들과 폭군에 대항하여 새 목록에 '고귀'라는 말을 새롭게 기록할 귀족이 필요하다.

사자의 의지를 가진 자에게 있어 인식하는 것은 '즐거움'이다.
(중략)
의지는 해방시킨다. 왜냐하면 의지를 갖는다는 것을 곧 창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위에 동그라미를 그려서 신성한 경계선을 만든다. 내가 점점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감에 따라 나와 같이 가는 사람의 수는 점점 적어진다.
(중략)
그리고 이 구더기는 올라가고 있는 영혼의 어디가 지쳐 있는지를 아주 잘 간파해 내는 특이한 재주를 지녔다. 그들은 그대들의 상심과 불만, 예민한 수치심 속에 구역질나는 그들의 집을 짓는다.
(중략)
자기 자신의 가장 넓은 영역 속에서 가장 먼 거리를 달리고 방황할 수 있는 영혼, 가장 필연적인 영혼이면서도 즐겁게 우연 속으로 뛰어드는 영혼, 현존하는 영혼이면서도 생성의 흐름 속으로 뛰어드는 영혼, 소유하는 영혼이면서도 의욕과 욕구속으로 뛰어드는 영혼.

오, 형제들이여. 그렇다면 나는 잔인한가? 그러나 나는 말한다. 쓰러지는 자는 오히려 걷어차 버려야 한다고.

그들은 자신이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을 괴롭힌다.


제 4 부

차라투스트라는 그 노인을 부축해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이 불행한 사람은 자기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몸부림을 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뻗었을 때, 그는 훨씬 더 큰 다른 욕망을 느꼈다. 즉, 이 완벽한 대낮에 그 나무 그들에 누워서 잠자고 싶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렇게 했다. 그는 여러 가지 풀의 정적과 친밀함 속에 눕자마자 갈증도 잊어버린 채 잠들어 버렸다. 그것은 차라투스트라가 흔히 하는 말대로 이 하나의 일이 다른 일보다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략)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충분하다!' (중략)
정말 가장 작은 것, 가장 희미한 것, 가장 가벼운 것, 쪼르르 달리느 한마리의 작은 고슴도치, 하나의 숨결, 하나의 잘못, 한 순간 등, 이런 사소한 것들이 최고의 행복을 만든다. 조용히 하라!

극복하라, 보다 높은 사람이여! 왜소한 덕을, 왜소한 지혜를, 모래알 같은 추측을, 개미 같은 초조함을, 비참한 안일을, 최대 다수의 행복을!
복종하기보다는 절망하라! 그리고 진실로 높은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오늘날 어떻게 사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대들을 사랑한다. 그대들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삶을 산다.

용감한 자란 공포를 알면서도 그 공포를 정복하는 자다. 심연을 보고도 뒷걸음치지 않는 자다.
독수리의 눈으로 심연을 바라보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심연을 움켜쥐는 자야말로 정말 용기 있는 자다.

"인간은 보다 착해져야 하며 또한 보다 악해져야 한다."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 초인의 최선을 위해서는 최대의 악이 필요하다.
(중략)
당나귀 귀를 가진 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기 위해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말이 누구의 입에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미묘하고 심원한 것이다. 양의 발톱으로는 그것을 움켜쥘 수 없다.

나는 그대들의 행로가 더욱더 험악해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어야만,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은 번갯불이 그들을 후려치고 그들을 때려부술 정도로 높은 곳까지 자라날 수 있다! 나의 마음과 동경은 예사롭지 않은 것, 오래된 것, 먼 것에 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발로 올라가라! 남의 힘으로 올라가서도 안 되고, 남의 등에 타지도 말고 남의 머리에도 올라타지 마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은 그대들의 항아리 속에서 서로 부딪히며 거품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중략)
그대들 주위에 작지만 훌륭하고 완전한 것들을 아주 많이 놓아 두도록 하라!

그처럼 지나친 사랑을 요구하는 자들을 피하라! 그들은 가난하고 병든 천한 자의 자식이다. 그들은 이 지상의 삶을 잘못된 관점에서, 이 대지를 사악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처럼 지나친 요구를 하는 자들을 피하라! 그들은 무거운 다리와 숨막히는 심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동상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또 기등처럼 단단하게, 돌처럼 둥글게 서 있지는 않다. 나는 질주를 즐긴다.

나의 고통과 타인들의 고뇌에 대한 나의 동정,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나는 나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내가 열망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일이다.


- 이 책이 좀 더 길기를 바랬다. 끝남이 너무 아쉬웠다. 나머지는 스스로에게 맡겨져 있는 것. 그가 말한대로 '내가 열망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한 인간이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끊임없는 사회의 잣대를 갖다대고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여러가지 방법으로 종용한다. 거기에는 도덕과 가족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다. 그렇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도 끊임없이.
그의 글은 나에게 힘을 준다. 기존의 내가 카뮈의 이방인처럼 느껴졌다면, (다른 생각을 가져서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면), 이제의 나는 스스로 이방인이기를 자처한 것으로 느껴진다 (다른 생각을 가져서 사회로부터 걸어나온). 깊은 산중에 외따로 떨어져 산다고 한들 내 삶은 충만할 듯하다. 이제 나는 무시하고 비웃는 나에 대해서 더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애초에 그랬어야 한 것이다. 너무 많은 세월을 가면을 쓰고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왔다. 온전히 한 인간으로, 삶을 누리는 것. 생각하고, 인식하고, 느끼고, 즐기는 것. 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 인식의 주체, 스스로에게도 멋진 것.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