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일 일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4부, 제1장 '있음'과 '함' -

인간존재는 가장 작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존재하게 해야 한다는, 지탱할 것이 없는 필연성에 어떤 종류의 도움도 없이 전적으로 맡겨져 있다. 그러므로 자유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자유는 인간의 존재이다. 다시말해 자유는 인간의 '존재의 무'이다.

특히 '자기포기'라고 불리는 수많은 행위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그것이다. 피로.열.굶주림. 목마름 등에 몸을 맡기는 것, 쾌락에 빠져 의자나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것, 누워서 아무렇게나 뒹구는 것, 자기 자신의 몸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 (중략) 그 경우, 자기를 '몸으로 만들려는' 기도는, 그때뿐인 셀 수 없이 많은 사소한 향략에, 셀 수 없이 많은 사소한 욕구에, 셀 수 없이 많은 약점에, 기꺼이 자기를 내던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사실은 불안.고독.책임은 그 강약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 의식이 그저 단순한 자유인 한에서 우리 의식의 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시작인 동시에 끝이 아닌 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은 체념에서 하는 수도 있고, 마지못해 하는 수도 있다. 선택은 하나의 도피일 수도 있다. 선택은 자기기만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도피하는 자, 종잡을 수 없는 자, 주저하는 자 등으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자기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 다양한 경우에, 목적은 하나의 사실적 상황의 저편에 세워진다. 게다가 그런 목적의 책임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의 존재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선택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대한 자'로 선택할 것인지, '고귀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 또는 '비열한 자', '비굴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이 허망한 노력이고, 그것이 허망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선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그것을 선택한 것은 집단 속에서 사라지는 것보다는 '끝'에라도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 또는 '존재'에 이르는 최상의 수단으로서 내가 낙담과 부끄러움을 선택했었기 때문이다. (중략) 열등한 예술가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되려는 '의지'를 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존재에게 있어서, '있음'은 '함'에 귀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략) 그러므로 인간존재는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존재에 있어서는, 존재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고, 행동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자유는 자기 존재의 '선택'이지 자기 존재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뜻대로 바꾸기는커녕, 스스로 자신을 바꾸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내 계급의 운명, 내 민족의 운명, 내 가족의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나의 권력과 나의 재산을 쌓아올리는 것에 대해서도, 나의 매우 사소한 욕망이나 나의 습관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유롭지' 않다.

보통의 사물이 한계로서 자기를 드러내게 되는 것은, 그런 테두리와 기술, 목적의 관계에 의해서이다.

'자유롭다'는 말은 '자기가 원하던 것을 획득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원하는 것(넓은 의미에서 선택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미이다. 바꿔 말하면, 성공은 자유에 있어서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략) 단순히 '선택의 자율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즉, 선택은 '함'과 똑같기 때문에, 꿈이나 바람과 구별되기 위해 이룸이라는 단서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나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동시에, 나의 상황에 대해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 그러나 또한 나는 결코 '상황 속에서밖에' 자유롭지 않다.

그 밖에도 만일 내가 그 조직에 따른다면, 나는 그 조직에 의존하게 된다. (중략) 내가 복종하는 한에서, 내가 순서 속에 나를 끼워넣는 한에서, 나는 '누구든 상관없는 누군가'의 인간존재의 목표에 따르며, '누구든 상관없는 누군가'의 기술에 의해 그 목표들을 이룬다.

그렇다 해도 '타인'의 존재는 나의 자유에 대해 사실상의 하나의 한계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 타인에게 있어서 즉자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타유화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중략) 왜냐하면 타인들의 존재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상은 거기에 존재하며, 다정하게 자기를 내밀고 있다. 그러나 이 나는, 하니의 부재에 불과하다. (중략) 자기를 심판하는 것, 즉 자기에 대해 타인의 관점을 취하는 것을 그 이상으로 삼는 불성실한 양심의 불안이 싹트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에게 있어서 '존재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그것을 '선택'해야지만 존재할 수 있다.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나의 자유 법칙은 이 경우에도 적용된다. 나는 타인에게 있어서 '내가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내가 타인에 대해 나타나는 그대로 나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다시 말해 하나의 선택적인 떠맡음에 의해서만, 나에게 있어서 '내가 타인에 대해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존재하도록 시도할 수 있다.

인간은 이미 인간적인 것밖에 만날 수가 없다. 더 이상 인생의 '저 너머'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하나의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인생의 최종 현상이기는 하지만 또한 인생이다. 이런 것으로서 죽음은 거꾸로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인생은 인생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다. (중략) 죽음은 '나의 것'이 된다. 내면화됨으로써 죽음은 개별화된다. 그것은 이미 인간적인 것에 한계를 지니도록 하는, 위대한 불가지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현상이며, 이 현상이 이 인생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뿐인 인생, 즉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인생, 결코 다시 새로 수정할 수 없는 인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가 된다. (중략) 죽음의 절망적인 의미를 깨닫게 하고, 그 결과 그들이 갑자기 '인생은 유일하다'는 그 절망적이고 도취되는 듯한 진리에 눈뜨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이다.


사실, 만일 '현존재'가 정말로 기도이고 앞지르기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당하지 않는다면', 현존재는 세계 속에서의 앞섯서 존재함을 더 이상 실현하지 않는 가능성으로서의, 그 자신의 죽음의 앞지르기이다 기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리하여 죽음은 현존재의 본래의 가능성이 되었다. 인간존재는 '죽음에 대한 존재'로서 정의된다. 현존재가 죽음을 향한 자기의 기도를 결정하는 한에서 현존재는 '죽는 것-에 대한 자유'를 실현하고 또 유한성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스스로 자기를 전체로서 구성한다.

"우리가 놓여 있는 상황은, 많은 사형수들  사이에 있는 한 사람의 사형수의 상황과 같다. 그 사형수는 자기의 사형 집행일을 모르고 있지만 매일같이 자기의 감방 친구가 처형되는 것을 본다."

죽음에 대비를 권장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지혜가 이해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죽음을 '기대된 죽음'으로 바꿈으로써 죽음을 되찾으려고 한다. 만일 우리 인생의 의미가 죽음의 기대가 된다면, 사실 죽음은 엉겹결에 닥쳐옴으로써 인생 위에 죽음 도장을 찍는 일밖에는 못할 것이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을 개별화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죽음은 한 사람의 '인격의' 죽음, 한 사람의 개인의 죽음이고,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해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임을 우리에게 지시한다.

죽음이 기대되는 한은 결코 없을 것이다. (중략) 죽음를 '각오하는' 것은 죽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가능성으로 보면,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기 전에 죽거나 또는 그보다 더 오래 살아남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인간존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존재는 자신이 그것으로 있지 않은 것에 의해, 자신이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알려 준다. 또는, 말하자면 인간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장래적 (와야-하는)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즉 그가 다른 작품을 쓸 수 있는 '소질이 있는지 어떤지' 알고자, 불안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시련을 거는 바로 그때, 그가 자기를 기대하고 있는 바로 그때, 갑자기 죽음이 그 작가를 덮친다. 모든 것을 미결정 상태 속에 밀어넣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죽음은 나의 모든 가능성 중에 하나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죽어버린 지금, 그의 인생이 현재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그 즉자적인 충실을 향해 말라비틀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인의 기억'밖에 없다. (중략)
'망각의 심연에 가라앉은 인생' (중략)
잊혀진다는 것은 타인의 어떤 태도의 대상이 되는 것, 타자의 마음 속에서 하나의 분명한 결정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선택한다. (중략) 그러나 이런 무관심 - 죽은 자들을 '다시 죽게' 하는 데 존재하는 이 무관심 - 은 죽은 자들에 대한 다른 태도들 가운데서 하나이다.

삶은 자기 자신의 의미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삶은 항상 유예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삶은 본질적으로 자기비판의 능력, 자기 변신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 능력에 의해 삶은 자기를 하나의 '아직-없음'으로 정한다. 또는, 말하자면 삶은 자신을 그것으로 있는 것의 변화로서 존재한다. 죽은 인생은 그것만으로 변화하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지만, 이 인생은 '이루어져 버렸다.' 다시 말하면, 죽은 인생에 있어서는 도박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죽은 인생에 있어서는 단지 임의의 결정적인 하나의 전체화만이 문제가 아니라, 나아가서 철저한 하나의 변모가 문제이다. 내부로부터 죽은 인생에 '닥쳐올' 수 있는 것은 이미 아무것도 없다. 죽은 인생은 완전히 닫혀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거기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죽은 인생의 의미는 외부로부터 변경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죽음'의 존재 자체는 우리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타자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송두리째 타자의 것이 되게 한다. 죽은 자로 있는 것은, 산 자의 희생물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결코 나의 존재론적 구조가 아니다. 적어도 나의 존재가 '대자'인 한에서 그러하다. 자기 존재에 있어서 죽음이 가능한 것은 '타인'이다. 대자존재 안에는 죽음에 있어서 어떤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자존재는 죽음을 기대할 수 도 없고, 죽음을 실감할 수도 없으며, 죽음을 향해 자기를 기투할 수도 없다. 죽음은 결코 대자의 유한성의 근거가 아니다. (중략)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성의 어떤 면, 그리도 대타존재의 어떤 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탄생한다는 것은 부조리이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도 부조리이다. 또 한편으로 이 부조리는 이미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타인의 가능성인, 나의 '가능성 - 존재'의 끊임없는 타유화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의 주체성의 외적인 하나의 한계, 사실상의 하나의 한계이다.

죽음은 내 선택의, 선택된 이면, 도피하는 이면으로서, '한계 - 상황'이다.

죽음은 '나'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나는 '죽음을 향한 자유'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하나의 자유로운, 죽을 수 있는 사람이다.

상황은 이 먼지 자욱한 이 언덕길이고, 내가 느끼는 이 타는 듯한 갈증이며, 내가 돈이 없는 까닭에 또는 내가 같은 나라, 같은 인종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을 때의 이 거부이다. 상황은 아마도 내가 예정한 목표에 이르는 것을 나에게 허락하지 않을 만큼 지친 몸을 이끌고, 적의를 품고 있는 그런 주민들 한복판에 내버려져 있을 때의 나의 고독이다.

'각자가 자기 자신의 문을 자기가 만든다'

이 자유의 사실이 인간적인 운명에 있어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생각건대 반드시 이로운 일일 것이다. (중략) 인간은 자유라는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므로, 전세계의 무게를 자기의 두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존재의 방식에 관한 한, 그 책임자이다. (중략) 대자의 책임은 압도적이다. 왜냐하면, 대자는 그것에 의해 하나의 세계가 '거기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자는 자기가 놓여 있는 상황이 어떤 것이든 '자기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자는 이 상황을 그 역행률이 아무리 견디기 힘든 것이라 해도 그것까지 포함하여 전면적으로 떠맡아야만 한다. (중략) 나의 신상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최악의 재앙, 최악의 위협도, 나의 기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중략) 내가 비인간적인 것을 '결정하게 되는' 것은, 단지 공포에 의해서, 도피에 의해서, 마술적인 행위에 의지함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 결정은 인간적이고, 나느 그 결정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질 것이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상황이 '내 것'인 것은, 상황이 나 자신을 선택하는 나의 자유로운 선택의 영상이기 때문이고, 상황이 나에게 제시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나를 표현하고 나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존재의 특징은 '인간존재는 변명 없이 존재한다'고 하는 그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이 전쟁 속에서 나는 날마다 나를 선택한다. 나는 나를 만듦으로써 이 전쟁을 내 것으로 한다. 만일 이 전쟁이 공백의 4년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요컨대 우리아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각각의 인간은 인식과 기술의 세계에서 출발한 하나의 절대적인 자기 선택이며, 이 선택이 세계를 떠맡는 동시에 세계를 비춰 준다. 각각의 인간으 하나의 절대적인 날짜를 누리는 하나의 절대자이고, 다른 날짜에 있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자문하느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잰에 이르게 된 이 시기의 가능한 의미들의 하나로서 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기 자체와 나를 구분할 수가 없다. 내가 다른 시기로 옮겨지는 것은 모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가 변명 없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회한과 후회도 없이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에 존재에 대해 내가 출현한 순간부터 나는 오직 나 혼자서 세계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으며, 그 어떤 것도 또 그누구도 그 무게를 덜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사실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자이다. 그러나 나는 내 책임 자체에 대한 책임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존재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세계 속에 '버려져' 있다. 그렇다 해도 나는 물결 사이로 떠다니는 널빤지처럼, 적의를 품은 하나의 우주 속에 버려진 채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하나의 세계 속에서, 오직 혼자서, 도움도 없이 구속되어 있는 나 자신을 갑자기 발견한는 것이며,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이 책임에서 한순간도 나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나의 욕구 자체에 대해서도 나는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나를 세계 속에 수동적으로 있게 하는 것, 사물과 타인에 대해 작용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도 또한 나를 선택하는 일이다.
또 자살은 '세계-속-존재'의 여러가지 존재방식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진정 대자는 불안 속에서 자기를 파악한다. 다시 말하면 대자는 자기의 존재의 근거도 아니고 타인의 존재의 근거도 아니며, 세계를 형성하는 즉자의 존재의 근거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 속 또는 자기 밖에서, 곳곳에서 존재의 의미를 결정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로서 자기를 파악한다. 자기의 버려짐까지 되돌아볼 정도의 책임 속에 내던져 '있다'고 하는 자기의 존건을, 불안 속에서 실현하는 자는 이미 회한도 후회도 변명도 갖지 않는다. 그는 이미 완전히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자유, 그 존재가 드러내 보임 자체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자유이다.


-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사상이 가장 집약되어 있는 부분이며, 내가 가장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던 부분이다. 인간존재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상황도 죽음도 그 회피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써 그토록 위대한 것이다. 모든 개인의 생은 그러므로 그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인간의 위대한 자유와 책임을 자기기만에 빠짐으로써 던져버리거나 외면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같은 자유와 책임을 가진 타인에 대한 존중을 져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유를 잊고 사는 것, 죽음을 잊고 사는 것, 타인의 생을 잊고 사는 것.
우리에게 지워진 존재의 무게가 무겁고, 불안의 크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록 크다 하더라도 인간존재가 한계 속에서도 가진 위대한 능력, 자유와 책임을 바로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자 또한 다른 대자의 타자로서 타인의 존재에 대한 존경과 배려, 또한, 타자가 죽음으로 그 존재를 잃었을 때 타자의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기억해 주는 일. 그것이 존재가 가장 인간적인 의미를 찾는 일이 아닌가 한다. 하늘은 푸르고, 자연은 아름답다. 그러나, 자연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오직 인간만이 그들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의미를 찾아 줄 수 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나의 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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