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일 월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4부, 제2장 함과 가짐 -

우리가 사랑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고, 비난할 수도 칭찬할 수도 있는 '플로베르'라고 하는 인간, 우리에게 있어서 '타인'인 그 인간, 그가 존재했었다는 단지 그 사실만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직접 덮치는 그 인간은, 본디 이런 욕망의 무한정한 하나의 기체, 즉 그런 욕망을 수도적으로 받아들일 불확정적인 일종의 점토와 같은 것일까 - 아니면 플로베르라고 하는 인간은 그런 환원될 수 없는 경향들의 단순한 묶음으로 환원되는 것일까? 어느 경우를 선택하더라도 그 인간은 사라져 없어진다. (중략) 그렇다고 해서 그 존재가 가루처럼 부서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존재속에서 하나의 중심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에 이 성향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사람들은 콩트가 이름 지은 의미에서의 '유물론'의 길, 즉 상위의 것을 하위의 것으로 설명하려는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전체이지 집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가장 피상적인 행위 속에도 있는 그대로 자기를 나타낸다. 달리 말하면, 아무것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 하나의 취향, 하나의 버릇, 하나의 인간적 행위란 없는 것이다.

프로이트 학파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헤아릴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거기에, 빛에 비쳐지며 존재한다.

인간에 대한 인식은 전체적이어야 한다.

정신은 끊임없이 작품을 생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품은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며, 정신의 이 산출에 대해서 말하자면 무관심하다.

고지식한 사상은 모두 세계에 의해 농도가 짙어져 있다. 그것은 응고시킨다. 고지식한 사상은 세계를 위해 인간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고지식한 인간은 '세계에 속해' 있으며, 더 이상 자기 안에 어떤 의지처도 지니지 않는다.

이를테면, 눈 덮인 고원, 알프스 고원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본다는 것은 벌써 그것을 갖는 것이다. 이 설원은 그 자체에 있어서 이미, 보는 것에 의해 존재의 상징으로서 파악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모든 소유물이 인간적인 질서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의 책임자이다.

자전거를 나에게 소속시키기 위해서는 한 장의 지폐를 건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그 소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나의 전 생애가 필요해질 것이다.

파괴는 - 아마 창작보다 더 훌륭하게 - 아유화를 실제로 이룬다. 왜냐하면 파괴된 대상은 더 이상 자기를 스며들 수 없는 것으로 보여 주기 위해 거기에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하나의 파괴적이고 아유화적인 반응이다. (중략) 내가 피우는 다재를 통해, 불타서 연기가 되는 것, 기체가 되어 내 안에 흡수되는 것은 세계였던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미래를 향해, 어떤 자기 기투를 향해 돌진하려 하지만, 자신이 그곳에 이르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하게 자신의 과거의 빨아들임에 의해 붙잡혀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인간은 신을 탄생시키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한에서는 자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관념은 모순되어 있다. 우리는 헛되이 자기를 잃어버린다. 인간은 하나의 이로울 것이 없는 수난이다.

- 이 부분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대목은 '소유'에 관한 것이었다. 소유란 단지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일이 아니라, 그 물건을 '함'으로 귀결시키는 것이다. 위의 자전거의 비유에 보듯이, 우리는 진정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욕심내고 창고 가득히 쌓아두고 있다. 진실로 우리의 생을 바쳐 소유할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 삶을 구성해나간다면,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죽음이 우리를 즉자화하기 전에.)
또한, 보는 것 그 자체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감상/감탄하는 것' 혹은 '봄으로 인해 마음의 움직임이 생기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본다. 매일. 현대와 같은 문명에서는 더 많은 것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보는 것은 얼마나 될까? 쓸데없는 것을 보느라고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닐까? 지금 하늘을 소유할 기회, 이 푸르른 봄날에 피어난 새싹들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데도 말이다. 카뮈가 썼던대로, '본다는 것, 이 땅 위에서 본다는 것, ...... 오직 바라보는 것이면 그만이었다.' 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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