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8일 수요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 제2부 -

그는 씨를 뿌린 사람처럼 기다렸다.

나는 나의 말을 골짜기 아래로 떨어뜨리고 싶다.
내 사랑의 물줄기가 길이 없는 곳으로 떨어진다 해도 개의치 않으리라.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들어갈 길을 찾지 못할 리는 없을 테니까.

인간이 존재한 뒤로 지금까지 인간에게는 즐거움이 너무 적었다. 형제들이여, 그것만이 우리의 원죄이다.

그러나 거지들을 가까이하지 말라. 우리는 그들에게 주어도 화가 나며 주지 않아도 화가 난다.
또 죄인과 옳지 못한 양심을 지닌 사람들도 가까이하지 말라. 내 말을 믿어라. 벗들이여, 양심의 가책이란 것에 계속 물어뜯기는 자는 언젠가 다른 사람을 물어뜯게 된다.

우리가 가장 부당하게 대하는 것은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만일 괴로워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대는 그를 위해 안식처가 되도록 하라. 딱딱한 침대, 간이 침대가 되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대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걸어온 길에 피로 표적을 새겼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피가 진리를 증명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피는 진리의 최악의 증인일 뿐이다.

삶은 등진 자들은 대부분은 사실 천한 자들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그들은 샘과 불길과 과일을 천한 자와 함께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중 사이에서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자로서 귀를 막고 살았다. (중략)
나는 코를 틀어막은 채 어제와 오늘의 사건 속을 불쾌한 기분으로 걸어 나왔다. (중략)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권력을 추구하는 천한 자들, 문필을 추구하는 천한 자들, 쾌락을 추구하는 천한 자들과 섞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왔다.
나의 정신은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갔다.

정신이란 스스로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다. (중략)
그리고 장님의 맹목적 탐색은 역시 그가 본 태양의 힘에 의해서 증명해야 한다. (중략)
또 그대들은 아직 한 번도 눈구덩이 속에 던진 적이 없다. 그럴 정도로 불타오르지 않은 것이다.

진정되지 않은, 진정할 수 없는 것이 내 안에 있다. 그것이 외치려 한다.

왜?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의해? 어디로? 어디서? 어째서?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아, 벗들이여, 내 안에서 이렇게 묻는 것은 황혼이다.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황혼이 되었다. 황혼이 된 것을 용서하라.


그렇다. 내게는 상처입힐 수 없는 것, 영원히 묻어 둘 수 없는 것, 바위까지도 부숴 버릴 수 있는 것이 있다 . 바로 '나의 의지'다. 그것은 묵묵히 굴복하지 않고 오랜 세월 속을 걸어간다.


침묵은 더 나쁘다.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은 채 감추고 있는 진리는 더 해롭다.

그렇다. 숭고한 자여, 그대도 언젠가 아름다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거울에 비쳐 바라보아야 한다. 그때 그대의 영혼은 성스러운 욕망으로 전율하리라. 그리고 그대의 자만심 속에도 존경이 가득 차리라!

그대들이 벌거벗었건, 온갖 색깔의 옷을 걸쳤건 나는 그대들을 견딜 수 없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나의 슬픔이다.

진실로 나는 태양처럼 삶과 깊은 바다를 사랑한다.

나는 학자들의 집에서 뒷발로 문을 세차게 닫고 뛰쳐 나왔다. (바젤대학 교수직 사임을 의미)
나의 영혼은 오랫동안 그들의 식탁에 같이 앉아 있었지만 배고픔에 시달렸다. 나는 그들처럼 호두 깨는 일을 목적으로 인식의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다.
나는 자유를 사랑한다. 나는 생기 있는 대지를 감싸고 있는 공기를 사랑한다. 학자들의 지위와 위엄 위에서 자는니 차라리 황소 가죽으로 된 자리 위에서 잠들고 싶다.
나는 내 사상으로 인해 불타오르고 있다. 그 때문에 때로는 호흡이 곤란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먼지투성이 방을 떠나 대기 속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차가운 그림자 속에 냉정하게 앉아 있다. 그들은 무슨 일에든 방관자로 남고 싶어한다. 그리고 태양빛이 타는 듯이 내리쬐는 계단에 내려서지 않으려 한다. 거리에 서서 입을 벌린 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처럼 그들은 꼼짝 않고 앉아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중략)
그들은 노련하다. 그들은 예리한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다양성에 비해 나의 단순성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손가락은 실을 다루는 법, 맺는 법, 짜는 법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리서 그들은 정신의 양말(무가치한 학문적 세공품)을 짜낸다.
(중략)
그들은 서로 감시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잔 꾀를 잘 부리는 절름발이 지식의 소유자를 잡으려고 기다린다. 마치 거미들처럼.
나는 그들이 언제나 신중한 태도로 독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들은 투명한 유리장갑을 끼고 있었다.
(중략)
그들에게 나는 이방인이다. (중략)
그래서 나와 그들이 함께 살고 있을 때는 내가 그들 위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증오한다.

내 말을 믿으라. 나의 벗, 지옥의 소란이여. 가장 중대한 사건이란 우리에게 있어 가장 소란스러운 시간이 아니라 가장 조용한 시간이다.
새로운 소란을 발견한 자들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자들을 중심으로 세계는 돈다. 소리없이 돌고 있다.

- 니체의 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진솔함에 고뇌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 중,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황혼이 되었다. 황혼이 된 것을 용서하라' 라는 구절에 묻어있는 것처럼, 인간이기에 끊임없이 목적을 묻고, 의심하고, 불안하고, 외로워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나가는 것. (아무나 자신의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심하고 실행하는 자만이 가지는 것이다.) 인생의 황혼.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보석처럼 빛난다. 그는 비판적 시각으로 인간사를 꿰뚫어 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경계할 것을 가르치면서도 두 팔을 벌리고 껴안고 있다. 모순이라고 말하지 말자. 모순된 가치도 품을 수 있기에 인간이 아닌가? 두려움에도 앞으로 나갈 수 있기에 인간이 아닌가? 그래서 위대한 것이 인간이 아닌가? 니체는 고귀한 정신이 세상의 가치에, 세상의 윤리에, 세상의 풍습에 감춰져버리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는 진흙 속의 진주를 건져 씻어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을 거울에 비추어 자신이 진주임을 알 수 있도록 진흙탕을 경계하라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인간이 모여서 이루어진 사회속에서의 인간은 매우 다른 모습을 띤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가진 개인도 사회라는 틀안에서, 다양한 역할과 도구로서 종용받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이 사회속의 타인들은 자신과 다른, 혹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개인을 참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기억되는 사람들은 이 다른 사람들,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그 길이 힘들고, 고단하고, 고독하더라도. 그러기에 인간은 그 모든 파렴치하고 비겁한 행위들에도 불구하고 멋진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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