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8일 목요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 중_1_ 서론, 제1편

그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쉬지 않고 치열하게 매달리며 탐구했던 존재에의 물음이지만 그 뒤 침묵해버리고 만다. (중략)
사람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불필요하다고 선언하고 나아가 이 물음을 소홀히해도 좋다고 시인하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물에 대한 이 보편적.직접적 개념이 가장 명백하고 더 이상의 어떤 논의도 필요로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개념은 오히려, 가장 어두운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마음도 어떤 의미에서 존재자다' 라고 하였다. (중략) 이 각별한 보편적 존재자, 즉 '모든 존재자와 합치할 수 있는 본성을 갖춘 존재자'는 바로 마음(anima)이다.

현존재란 스스로 존재하면서 스스로 존재에 대해 이해하려는 존재자이다.

공동존재 (일상적인 나)와 공동현존재 (실체적.보편적인 나)가 그것이다.

세계에 근거하지 않은 단순한 주관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결코 주어져 있지도 않다. 마찬가지로, 우선 고립된 자아가 타인들 없이 주어지는 일도 절대로 없는 것이다.

이렇게 환경적으로 해방된 존재자는, 그 가장 고유한 존재의미에서 볼 때, 세계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공동으로 현존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그 동일한 세계 안의 내(內)-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는 이렇게 배려된 세계에 녹아 들어가는 존재가 아니다. 즉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존재에 녹아들어가는 자신이 아니다.

현존재는 일상적 상호존재로서 타인의 통치하에 있음을 의미한다. 현존재가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그 현존재로부터 존재 (외면적.일상적 존재)를 빼앗아버렸다는 것이다. (중략) 중요한 것은 공동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되는, 눈에 뜨지 않는 타인의 지배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사실상 평균성 안에 살고, 그 집요하고 강력한 평균적 입장에서 그때마다 뭔가 타당한 대상을 정하고, 모든 평균적인 경향을 시인하고 호평하며 그렇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으로서 거부한다. 이 평균성은 허락된 기획의 가능범위를 미리 지도한다. 어떠한 예외도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그래서 아무리 고귀한 진가를 가진 것이라도 소리하나 내지 못하고 억눌리게 된다.

'현(Da)으로'는 '거기'와 '여기'를 동시에 가리킨다.

인간 안의 '자연의 빛'이라는 존재적 비유적인 표현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현'이라는 존재방식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이 존재자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구조 그것을 의미한다. 이 존재자가 '조명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의거해서 세계내존재로서 밝에 비추어 준다는, 즉 다른 존재자에 의해 상호관계적으로 비추어진다는 말이 아니며, 자기 자신이 스스로 밝음이라는 그런 의미에서 비추어진다는 의미이다. (중략) 현존재는 스스로의 개시성 (열어보이는 성질) 인 것이다.

심경(心境)은 현존재를 열어보인다. 즉, 그 '피투성 (세계 속에 존재로서 몸을 던짐)' 에서와 현존재의 존재와 더불어 그때그때에 이미 열어보여진 세계로의 '의존성'에서 열어보인다. 뿐만아니라, 심경 그 자체가 실존론적인 존재양식이며, 이 존재양식으로 현존재는 자기를 부단히 '세계'에 넘겨주고 있고, 자기 스스로 어떤 방식을 통해 회피하듯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렇게 회피하는 실존론적인 근본양식, 그것이 현존재 스스로의 '현 (現)'이다.

이해가 '기투(企投)'라고 불리는 실존론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소음'을 '듣기' 위해서는, 미리 복잡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중략) 주관(主觀)을 발로 걷어차고 마침내 하나의 '세계성'에 도달하는 도약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 감각의 혼잡이 먼저 형성되어야만 한다.

'자연의 빛'에 대해서 지적하고, 내존재의 개시성을 현존재의 '광명'이라고 불렀다. 현존재의 이 광명 속에서 비로소 시야라는 것도 가능해진다. 시야는 현존재에 적합한 모든 개시의 근본양식, 즉 이해를 염두에 두면서 존재자가 진정 자기 소유가 된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 존재자란 현존재가 자신의 본질상 모든 존재가능성에 따라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자이다.
(중략)
인식도 이미 '보는 욕망'에 의거해서 파악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략) 근원적이고 참다운 진리는 순수직관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 감관의 경험을 통틀어 '눈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이미 '현재 거기에' 있지만 - 다시 말하면 위협에 미치는 사물은 가슴이 답답하도록 숨이 막힐 만큼 가까이에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 그러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도대체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는 어떤지, 또 세계라는 존재가 증명될 수 있는지 어떤지 하는 물음은, 이미 세계 내에 존재하고 있는 현존재로서는 무의미한 물음이다 - 하지만 그 현존재 외에 누가 이 같은 물음을 설정할 수 있단 말인가.

로고스에는 비은닉성 '아 레테이아 (진리)'가 속해 있다. (중략) '자명하다고'

현존재의 존재기구에는 '기투'가, 즉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보이려는 존재가 속해 있다. 현존재의 존재구성은 세계 속으로 자기를 '기투'한다. 그서은 자신의 존재가능을 향해 자신을 열어보이는 존재다.

'영원한 진리'를 주장함은, 현존재의 현상적 근거인 '관념성'을 관념화된 절대적 주관이라는 것과 혼동함과 같이, 철학적인 문제성의 내무에서 아직도 철저하게 추방되지 못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잔재에 속한다.


-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제목만으로도 그 매혹을 알 수 있는 책이었다. 많은 시간을 내서 읽어야 할 것 같아 시간을 미뤄 한꺼번에 읽었다. 처음에는 그의 사색에서 나온 철학적 진술이 기존의 다른 철학자들과는 사뭇 달라 혼란스러웠다. 이론적으로 설명하거나 검증이 전혀되지 않는 하이데거 자신의 사색에 기초한 생각의 나열은 동의를 불러 일으키기에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나서 하이데거의 철학적 자세를 이해하고, 이 책이 미완성임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 내가 느꼈던 혼란스러움이 오히려 당연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가치가 더 큰 것임을 알게 되었다.
존재에 대한 치열한 물음은 모든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만큼 많은 시간을 그 물음에 대답하고, 현존재를 정의하고, 현존재와 세계와의 관계를 규명하려 하고, 그럼에도 불투명한 현존재의 광명을 제시하려 애 쓴 사람도 없는 듯하다. 이후 샤르트르가 존재의 현존에 대해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규명할 수 있었던 것은 하이데거의 이러한 철학적 노력이 밑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하이데거의 사상중, 가장 내게 와닿은 멋진 부분은 현존재의 '광명'에 관한 부분이다. 어두운 전쟁의 상황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기본적 믿음과 신뢰를 놓지 않았던 하이데거의 사상이 미디어와 물질문명의 암흑에 덮여 인간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잃어버린 (타자에 의해서뿐 아니라 스스로 잃은) 현재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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