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8일 목요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 중_2_ 제2편

이해란 본디 어떤 의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투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가능을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다.

현존재의 존재는 관심이다. 관심 내부에는 사실성 (세계 속에 내던져진 성질), 실존(기투), 퇴락이 포함되어있다. (중략) 현존재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는, 관심을 통해 자신의 내던져진 성격상의 사실로서 끊임없이 존재한다. (중략) 그리고 현존재가 실존하면서 자기 존재가능의 근거이기도 하다는 사실 역시 전적으로 같은 이유다. 현존재가 그 근거를 스스로 구축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현존재는 그 짐을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짐의 무게가 기분에 의해 현존재에게 무거운 짐으로 나타난다.
(중략) 그것은 오직 현존재 자신이 이미 내던져져 있는 곳에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기투하는 존재양상일 수밖에 없다. 현존재가 자기인 이상 자기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마련해야만 하는데, 이 현존재인 자기는 결코 그 근거를 자신의 뜻대로 다루지 못한다. 그런데도 자기는 계속 실존하면서 사신이 근거가 되는 일을 떠맡아야 한다. 스스로의 내던져진 성겨적인 근거를 존재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존재의 밑바탕에 있는) 관심이 관련되 있는 존재가능이다.
현존재는 내던져진 존재로서 실존하면서, 즉 자신의 근거가 되면서 스스로 모든 가능성 뒤에 부단히 서 있다. (중략)
현존재가 자신의 근거가 되는 것은 자신의 실존에 통해서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가능성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그런 이해를 통해 내던져진 존재자로서 존재함으로서이다.

이 존재자가 해야 할 일은, 그 책임을 본디적으로 짊어진 채 존재하는 일이다.
위 해석에 따르면 양심이 호소하는 소리를 올바르게 듣는다는 것은, (중략) 가장 고유한 자신의 본디적 책임을 지면서 존재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를 기투하는 행위다.

일상성은 현존재를 배려해야 할 존재, 다시 말해 관리해서 끝마쳐야 할 용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경우 '인생'이란 수지가 맞든 안 맞든 일종의 '사업'인 셈이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에 포함되어 있는 개시성의 3가지 구성 요소를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첫째 요소는 불안한 심경이다. 둘째 요소는 가장 고유한 책임 있는 존재를 향한 자기 기투로서의 이해이다. 마지막 셋째 요소는 침묵을 지키는 이야기이다. 이 3가지로 구성되는 개시성은, 현존재 자신에게 있어 그의 양심에 의해 증명되는 본디적 개시성이다. 이 두드러지는 본디적 개시성은,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의 책임 있는 존재를 향해, 침묵을 지키고 불안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기투함을 뜻한다. 이 두드러지는 개시성을 이제부터 결단성 (決斷性, Entschlossenheit) 이라 부르겠다.

세상 속에서 세인들이 기도하는 일에 대한, 애매하고 시기심 섞인 약속이나 수다스러운 우호관계 등으로부터 진정한 상호관계가 탄생할 리 없다.

현존재가 자신을 단호하게 내보이는 모습, 즉 결단성은 무엇을 위한 결단성일까? (중략)
이처럼 세인 속에 녹아들어 있던 현존재가, 자신을 불러 일깨우는 소리를 듣고 그에 따르는 것이 바로 결단성이다. 그래도 세인의 비결단성은 여전히 지배력을 휘두를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단하 실존을 아래로 끌어내리지는 못한다. (중략)
결단성을 통해 현존재는 가장 고유한 자기 존재가능에 접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던져져 있는 존재가능이므로, 특정한 사실적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기투할 수밖에 없다. 결단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결단성의 결단을 통해 현실적으로 간으한 것을 비로소 발견하며, 심지어 그것을 세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으로서 가능한 형태로 장악할 수 있다.
(중략) 우리가 마주치는 온갖 사정이나 우연한 사건 등 객체적인 혼합물 따위를 상황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상황은 오직 결단성에 의해서만, 또 결단성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실존하면서 스스로 현으로 존재하는 자신이 그 현을 향해 결단하고 있을 때에만, 온갖 사정이 지닌 그때그때의 사실적 적소성이 비로소 자신을 향해 개시된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공동세계와 환경세계로부터 때가 되었다는 듯이 우리 앞에 뚝 떨어지는 일도, 그 우연을 받아들일 결단성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럼 세인에 대해서는 어떨까? 위와는 반대로, 상황이 세인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굳게 닫혀 있다. 세인으 고작 '일반 정세'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세인은 눈앞의 '기회'에 정신이 팔려, 온갖 '우연'을 조합하여 현존재를 요리한다. (중략)
결단성은 현의 존재를 상황의 실존 속으로 가져온다. (중략) 대신 양심은 우리를 상황 속으로 불러낸다. (중략) 결단성은 상황 속에 이미 몸담고 있고, 현존재는 결단하는 현존재로서 이미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현존재는 침묵하면서 불안을 받아들이는 결단성을 통해 근원적으로 고독해짐으로써 본디적 자기가 된다. 본디적 자기존재는 침묵하는 것이므로 '내가, 내가......'라고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다. 그 존재는 침묵한 채 자기 스스로 그것으로서, 본디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내던져진 존재자인 것이다. 결단하는 실존의 침묵이 드러내는 자기야말로, '자아'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기 위한 근원적인 현상적 지반이다.

이 도래 (到來, Zu-kunft) 는 그때마다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향해 오는 것으로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고 현존재는 이러한 가능성으로서 실존하고 있다.

환경적 존재자는 이제 적소성을 잃었다. 내가 실존하고 있는 세계는 무의미함의 바다 밑으로 잠겨 버렸다. (중략) 불안은 '세계의 무'에 임할 때 불안감을 느낀다.  (중략) 적소성을 잃어버린 존재자는 공허한 비정함으로 현존재에게 다가온다. (중략) 그런데 이 공허한 세계에서 '이해'는, 불안을 통해 결국 세계내존재 그 자체와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불안이 최종적으로 임하는 대상은 바로 세계내존재다. (중략)
불안은 세계의 무의미성을 열어보인다. 이 무의미성은 배려 가능한 것들의 무성(無性)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자신이 배려해 온 일에 일차적으로 바탕을 두었던 실존의 존재가능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는 행위는 이제 불가능하다"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불가능성이 나타난다는 말은, 본디적 존재가능의 희미한 가능성을 목격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한다.
(중략) 불안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섬뜩함 속으로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적나라한 현존재'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이 선험적 본디성 안에서 스스로 존재가능했었다는 점으로부터 자기를 이해하고, 이 세계 속에서 죽음을 응시해야하는 고통을 견뎌 내면서, 자기 자신인 존재자를 그 세계 속으로의 피투성에서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의 사실적인 '현'을 결단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상황에 대한 결의를 뜻한다.

가능성을 선험하면서 자기 내부에서 죽음의 위력을 키워 나갈 때, 현존재는 죽음을 향해 자유로워지며 그 유한한 자유에 깃드는 자신의 '압도적인 힘'에서 자시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때그때의 선택이 스스로 선택한 것 안에서만 '존재하는' 이 유한한 자유에 있어,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떠맡겨져 있는 '무력(無力)'을 받아들이고 그곳에 개시되어 있는 상황의 모든 우연들을 투찰하게 된다. 그러나 운명적인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인 이상,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재에서 실존한다.

결단성 속에는, (가능적으로) 선험하면서, 또 자신을 순간의 현에 전승하면서 부탁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결단성의 일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빌헬름 딜타이와 파울 요르크 폰 발텐부르트 백작과의 왕복서한' 중>
"아무리 실재적인 것이라 해도, '물자체'라고 간주하기만 하고 실제로 체험되지 않는다면 단순한 그림자가 될 뿐입니다." (중략)
"이렇게 나는 조용한 자기 대화를 즐기고, 역사의 정신과의 교류를 즐기고 있습니다. (중략) 그 일을 추구하는 노력은 야곱의 격투와도 비슷해서, 격투하는 사람 자신에게 반드시 이익을 줍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요르크는 역사의 근본적 성격이 '잠재세력'임을 정확히 통찰하고 있다. (중략)
"철학하는 일은 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처럼 '해시계'를 보고 알아내는 시간, 하지만 또 어는 회중시계를 봐도 직접 알아낼 수 있는 이 시간은, 대관절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오히려 '시간'은 먼저 '하늘'에서 나타난다.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태도로 '시간에 순응할 때' 시간을 발견하는 장소가 바로 하늘이다. 그래서 '시간'은 이따금 하늘과 동일시되기조차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마음이나 마음의 정신 이외에, 헤아리는 소질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즉 마음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썼다. "이리하여 나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넓이일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의 넓이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것이 마음 그 자체의 넓이가 아니라면 놀랄 일입니다."

그 '진보'의 한 걸음마다 정신은 자기의 목적에 대해 진실로 적대적인 장해로서의 '자기 자신'을 극복해 나가야만 한다. 정신의 발전 목표는 '자기 자신의 개념을 달성하는' 일이며, 그 발전 자체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벌이는 엄격하고 무한한 투쟁'이다.

시간이란 '외적'인 직관된 자기이며, 자기에게 '파악되지 않은' 순수한 자기이다. 즉 단순히 직관된 개념이다.

존재 전반의 '이념'의 근원과 가능성에 대해 형식논리학적 '추상'을 써서 살펴보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음과 해답의 정확한 지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존재론의 기본적인 물음을 해명하는 '길'을 추구하며, 그 길을 실제로 '걷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이 '단 하나의' 길인지, 아닌지, 또 그것이 애초에 '제대로 된' 길인지 어떤지는, 그 길을 걸은 다음에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존재의 해석을 둘러싼 싸움은 조정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싸움은 아직 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까닭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싸움에 불붙이는 일 자체가 이미 상당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근본적인 탐구는 오로지 이를 위한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 어디까지 온 것일까?



- 답은 없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라는 저작에서는 답은 없다. 그러나 문제를 제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존재의 근원이자 본질임을 그는 주시하고 있다. 또한, 그 문제를 제시하고, 생각하고, 결단하고, 자신을 대면하는 일. 그것이 존재를 현존재로 만드는 핵심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 말하고 있는 것처럼 존재론의 해명을 위해서는 실제로 그 '길을 걷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방법이나 정의도 내려진 것이 없다는 말이다. 각 존재만이 자신의 유일한 답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서 있는 것, 걷는 것, 자신이 그 길을 걷는 것을 인지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것이다.
결단성을 가지고, 불안함을 가지고, 이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의미자체를 현존재의 손에 들려준 것, 인간의 가치를 인간에게 회귀시켜준 것 (오직 퇴락의 길을 걷지 않고 자신을 결단성 속에 내던지는 사람에게만 한해서), 그것이 하이데거의 크나큰 업적이 아닌가 한다.
하이데거는 그의 사색의 결실을 통해 세상-내-존재로서 진정한 현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출발선 상에 우리를 세워 놓았다. 이 어렵고도 불안한 길, 순간 순간을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이 길. 죽음이라는 한정속에 시간의 거울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는 그런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발광(發光)하여 주변의 존재들을 비추어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기를, 이 철학과 사색이 매장된 미디어의 암흑속에서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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