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5일 금요일

장용학의 '비인탄생'

건너편 능선 저쪽에 저 끝까지 지붕이 이랑을 이룬 도회의 회색, 저것이 인간 정신의 피부란 말인가? 체온이었단 말인가?
그것은 묘지였다. (중략) 자연의 군더더기가 날려다 벌어지는 지정구역이었다. 인간은 말하자면 그 소제부이다. 그 쓰레기를 염색해서 뒤집어쓰고 그들은 그것을 문명이다 과학이다 예술이다 에티켓이다 축구시합이다 코카콜라다 하고 흥분한다. 흥분에서 가치가 생긴다는 것이다. (중략)
저 하늘의 맑음을 보고, 저 산의 숭엄함을 보고, 저 전야의 부드러움을 보고, 그리고 시선을 당기어 도시를 보아라. 지상에서 제일 지저분한 부분이 도시다. 그 속에 미가 있다면 어떤 미이고, 그 속에 의가 있다면 어떤 의이고, 리가 있다면 어떤 리겠는가.

그 손이 멈칫해졌다. 온몸이 옴투성인 것만 같은 것이다. 손으로 찝으면 살이 흐무러지면서 진물이 줄줄 흘러나올 것만 같다. 고름 부대,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은 뉘 집 아들이 아니고, 고름 부대인 것이다. 아직 흐무러지지 않아서 고름이 흘러나오지 않고 있을 뿐이다.

심심하지도 않을 텐데 몇 번을 그렇게 놀다가 무심결에 그는 그 티끌을 잡아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희미한 티끌이었다.
그저 기류를 타고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가지고 날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그 둘레에는 명주실 같은 무리가 걸려 있다.

내 눈에 일어나 현상인데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제 마음대로 논다. 내 속에 나 아닌 것이 있는 셈이다. 나의 의지에 속하지 않는 나의 기능이 있다. 인간 속에 인간이 속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이것이 <무>라는 건가.......

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사실이다. 그런데 그 신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신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아무 이의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괴리!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것이 잔상의 일종이든 괴리이든 그것은 내가 아니다. 적어도 현재의 나는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현재로 나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생이라는 것의 자세인가?
무가 유를 제거하고 있다. 과거가 현재에다 구멍을 내고 있는 것이다. 그 구멍을 메우는 작업이 <생>이라는 말인가?그러서 아무리 나를 꽉 붙잡으려고 나를 꼭 껴안아도, 어디론지 내가 흘러나가 버리고 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땅이 아닌 땅에서 나의 땅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거기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나는 여기서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살고 있다. 이것은 나의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가 아닌 곳에서 살아야 하는 모욕. 인간이란 모욕인가? 모욕에 그쳐야 하는 것이 인간이란 이름인가......?

사람의 미골은 꼬리가 있었던 기념이 아니라 이제부터 거기서 꼬리가 생겨날 징조인지도 모른다. 파리가 이렇게 번식하는 공기 속에서 그렇게 딴딴하게 달려 있었던 꼬리가 없어졌을 리 없다. 그렇게 미학적인 인간이 그렇게 미학적인 꼬리를 없애버렸을 리 없다. 그러게 고적보조회 회원이 되기를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그 <고적>이 인멸되어 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을리 만무다.
이제 거기에 꼬리가 나봐라. 인생이 얼마나 부드러워지고, 세계가 얼마나 밝아질 것이겠는가. 사람들은 우선 자기가 땅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깨치게 될 것이고, 하늘이 높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서 있는 것이 어쩐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설레어질 것이고, 마침내 두 손으로 땅을 짚을 것이다. 마음에는 지동설의 현기증이 비쳐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손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그만둘 것이다. 만들어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물건은 필요없게 될 것이다. 모든 물건이 없어질 것이다. 이름이 없어진다. 이름이 죽는다......

우습지도 않다. 슬프지도 않다. 그저 그렇다. 더 우습고 더 슬픈 것이 저 도시에는 전봇대의 수효보다 많으니 말이다. 그 쓰레기더미를 좋게 표현하면 신화의 숲이다. 거기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공공연하게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양담배 서너 갑과 목숨이 흥정되는 수도 있다.

저 방에서 어머니의 신음 소리도 곤히 잠들고, 지상은 깊은 무에 젖어 있고 하늘에선 별들이 소리없이 영겁의 곡성을 뿌리고 있는데, 나는 소변을 보겠다고 허정허정 변소를 찾아간다. 이것이 산다는 건가? 이렇게 치사스러워야 생인가? 그래도 바지가 흘러 내릴까봐 춤을 꼭 잡아쥐고 허정거려야 삶이 살아진단 말인가? 지저분한 그 생을 비단에 싸듯 꼭 싸들고 소변을 보는 나의 그림자. 생의 비극적 포즈, 그런 소변을 보고 나서도 후련해하는 내 마음......

아들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저렇게까지 해서 먹여 주는 것일까?

죽음이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중지였다. 중지된 채로 흐지부지해져 버리는 것이었다. 중지된 채로 영원히 그러고 있어야 하는 무료......


- 전후 50~60년대의 한국 단편을 손에 든지 며칠, 그리고 아름다운 문체와 깊이를 가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장용학의 '비인탄생'을 읽으며, 그 철학과 문장이 샤르트르의 '구토'와 비견할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오히려 문장의 유려함은 그 이상으로 생각된다.
인간존재와 도시로 비견되는 사회의 대립구조, 자신의 어머니조차 부양하지 못하고 굶겨죽이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못하는 주인공, 자연으로의 회귀에 대한 열망, 죽음으로도 그 존엄을 회복하지 못하는 존재의 무보더 더한 처량함, 등이 지적이고도 유려한 문장으로 살아난 듯 하다. 단편임에도 장편에 못지 않는 무게와 철학을 지닌 소설.
요즘들어 문학상 작품집을 읽으며 실망을 금치 못했다. 마치 소설이라는 형식만을 위해 쓰여진 듯한 글들을 읽으며 낙담한 마음이 전세대의 치열한 단편들을 읽으며 위로받은 듯 하다. 이렇게, 이렇게 써야하는 것이다. 단 한줄을 쓰더라도 자신을 속이는 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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