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8일 목요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 중_3_ 생애와 사상 by 전양범

1920년에 쓴 편지에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적어도 뭔가 다른 것을 원한다네. 많은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오늘날의 현실인 붕괴 현상 속에서 '좋든 싫든' 경험하고 있는 것을, 그것으로부터 '문화'가 태어날지 아니면 몰락을 재촉하는 것이 태어날지 하는 문제는 제쳐 두고."
또 1921년에 쓴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그리고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겠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는 내 철학적 임무를 현대 일반에 대한 문화 문제에 맞추어 재단하지는 않을 걸세.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그리고 나에게서...... 유래된 사실을 바탕으로 내 일을 하겠네. 이 사실과 더불어 실존하는 것이 격동하는 것이라네."

이 책의 진의는 그때마다 항상 애매함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리하여 '존재와 시간'이 현대의 사상계에서 깊은 애매함에 둘러싸여 있으며, 스스로 그 애매함을 발산하고 있다는 사정이 한층 명료해졌다. (중략) 그것은 하이데거 '자신의 그림자'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이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훨씬 오래 전부터 이미 알았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과거가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알 수 없게 되어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의 첫머리에 나와 있는 플라톤의 말이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의 현존재는 타인의 지배아래 자기 자신을 잃고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평균성을 기준으로 하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안심한다.

세계에 몰입하여 '사람'으로 해소되고 자기 자신을 잃고 있는 현존재의 일상적인 모습을 하이데거는 '퇴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상성에서는 아야기되는 것에 관계를 나누어 갖는 대신에 단지 이야기되는 그것만이 중요해진다.

이 잡담 속에서는 애매함이 그 내용의 진정성을 잃게 하여 현존재의 가능성을 질식시킨다.

거꾸로 말하면 퇴락이란, 자기 자신일 때 느끼는 이 까닭모를 불안함을 피하기 위해 본디적인 자기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까닭 모를 불안함을 견뎌야만 한다.

이른바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게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해 왔고,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을 죽음의 거울에 비추면서 살아간다면, 그 순간을 자신의 삶 전체를 살아나가는 것처럼 충실하게 살아갈 것이다.

과학은 무를 알려고 하지 않고, 또 무는 논리학에서도 파악되지 않는다. 무는 불안하다는 기분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불안은 존재자 전체를 사라지게 하고, 우리는 아무런 버팀목도 없는 동요 속에서 무를 경험하는 것이다.

"불안한 무의 밝은 밤에 비로소 존재자 그 자체의 근원적인 열림이 생기는, 그것은 즉 존재다이고 - 무는 아니라는 것을"

형이상학이란 그리스어 meta-physica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하이데거는 이용어는 나중에 존재자를 '넘어서 (meta)' 나아가는 물음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형이상학이란 존재자를 초월하는 물음'이고 이것은 무에 대한 물음 속에서 생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언어의 작용은 종종 시를 통해 해명된다. 언어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시작(詩作)' 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의 시작이란 문학작품으로서의 시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앞서는 더욱 근원적인 인간의 본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중략) '시작이야말로 근원적으로 사는 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시작이란 존재의 말에 대한 응답이라고 보아도 좋다.

'존재는 사색을 통해서 언어로 온다'

즉 주관주의는 '존재망각'에 기초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존재망각의 한복판에 있다.

인간의 역사는 존재망각의 역사이며, 현대는 그것이 극도에 이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횔덜린의 시를 인용하여 '결핍된 시대' 또는 '세계의 밤의 시대'라 불리는 존재망각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대의 기술적 세계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본연의 모습을 설명한 <평정>이라는 소설 속에서도 하이데거는 '기다리는 것'을 설명한다. (중략)
또한 기다리는 것은 '망보는 것', '지켜보는 것'이다. 지켜보는 것은 '사는 것'이다. (중략) 인간은 '존재의 목자'이며 '존재의 문지기'이다.

결핍된 시대 또는 세계의 밤의 시대란, '가버린 신들은 이제 없고, 와야할 신들은 아직 없는 시대', 즉 신들의 부재의 시대를 말한다. (중략)
여기서 말하는 신들을 존재라 해도 좋다. (중략)
시인을 '집의 친구'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세계라는 집의 친구란 어떤 사람일까. 하이데거는 헤벨의 말을 따라, 그것을 지구에 대한 달에 비유한다. 달은 밤에 우리에게 부드러운 빛을 내려준다. 그 빛은 달이 스스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태양빛을 반사하여 보내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친구인 시인은 세계의 밤에 혼자 깨어 있는 자이다. 그는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다시 지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세계를 밝힌다. 그는 사람들이 존재로부터 받고 있으면서도 밤에 자는 사이에 잊어버린 것을 지켜보고, (중략)
하이데거가 설명하는 시인은 이처럼 그가 들은 말을 전함으로써, 존재망각이라는 밤에 사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시인이 단순히 문학작품으로서의 시를 만드는 특이한 재능을 지닌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본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중략) 사람이 세계에 사는 본질적인 모습, 존재의 목자로서의 본모습을 시인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 특별히 해설 부분을 다시 적은 것은 '존재와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다른 부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은 '존재와 시간'으로 발화된 듯 하나 아직 전파의 단계는 아닌 것 같이 생각되었다.
하이데거가 언어를 소중히 여긴 것에 대해, 시작(詩作)의 역할에 대한 믿음을 가진 것에 대해 너무도 기쁘고 안도한다. 문학작품이 단순한 유희거리가 아닌, 존재 자체를 밝혀줄 수 있는 존재로부터 나온 등불과 같은 것임을 일깨워준 것은 너무도 고마운 일이다. 스스로 밤에 혼자 깨어있는 사람, 존재자체로의 불안과 더불어 사람속에 녹아들어가지도 못하는 외로움을 더하고도 존재에게 빛을 전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은 그 누구나이고 그 누구도 아닐 수 있다. 다만 그것은 매순간의 선택, 하이데거가 말한 결단성을 가지고 자신을 세계속에 던짐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내게 주어진 하나의 삶, 하나의 순간, 세계를 전부로 만드는 하나의 연약한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으로서, '어떻게'라는 문제를 손에 쥐었다. 어렵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놓아버리고 싶고, 잠 못 드는 순간이 이어지더라도 나의 존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침묵하고', '기다리고', '지켜보고', '써내는' 그런 삶, 모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세기의 철학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모두의 비웃음을 안고도 불안한 밤, 현존재를 비추는 달로써...... 삶의 의미를, 혹은 무의미를 찾아.
니체가 말한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 하이데거에 의해서도 마찬가지, 그것도 매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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