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0일 금요일

밀란 쿤데라의 '농담' 중

여러 해 동안 나를 내 고향으로 이끌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 도시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 같았다. 벌써 15년 전부터 다른 곳에 살고 있었고, 이곳에는 이제 아는 사람도 친구도 몇 없었던 것이다(남아 있는 친구도 피하고 싶다). 어머니도 내가 돌보지 않는 낯선 무덤 속에 묻혀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왜 그토록 자유가 필요한 거죠?" 나는 물었다. - "그러면 당신은요?" 그가 말했다.

그와 논쟁을 하면, 나는 정말 누구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언제나 확인할 수 있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자신의 진리를 내게 납득시키려고 애쓸 수 있는 오랜 친구가 옆에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특별히 구체적인 것은 없고, 다만 "너는 그렇게 행동하니까"라는 것이었다 -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데?" - "언제나 묘하게 웃쟎아" - "그래서? 난 즐거움을 표현한는 거야!" - "아니야, 너는 혼자서만 마음에 담아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웃어"

나는 다른 사람이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고 혁명 자체가, 시대 정신이 틀릴 수도 있으며, 나 하나가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 말을 믿게 되었다. 나는 미소지을 때 조금 조심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곧 내 안에서 (시대 정신에 맞추어) 내가 되어야만 하고 되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나는 정말 누구였을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아주 정직하게 답하고 싶다. 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금 그때의 내 상황을 생각해 보면 신도들에게 근원적이고도 영원한 죄인임을 상기시키는 기독교의 저 막강한 힘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바로 그런 식으로 나는(우리 모두가 그랬다) 혁명과 당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래서 장난으로 썼다 해서 내 엽서가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길들여지게 되었으며, 머릿속에서 자아 비판의 검토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한 인격 박탈은 처음 얼마간은 마치 안개 속에서처럼 분간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중략) 시간이 가면서 안개는 천천히 걷혀갔고, 그와 함께 그런 비인격화의 어스름 속에서도 사람들의 인간적인 요소가 조금씩 눈에 띄게 되었다.

그 어떤 병사도 이 정치적인 행동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저 지배자 앞에서 하지 않을 수 없는 무의미한 몸짓으로만 여겼다.
나는 그렇게 해서 결국은 나의 저항이 헛된 것이며, 내가 다르다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므로 이제 오로지 나에게만 파악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 삶의 길 밖으로 내던져진 것이었다.

그랬다. 모든 끈이 끊어져 있었다.
모두 끝났다. (중략) 내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 그것을 나는 이전의 그 어는 때보다 더 내밀하게 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알았던 시간, 일로 사랑으로 온갖 노력들로 탈바꿈된 그런 시간, 내가 하는 일들 뒤에 살그머니 숨은 채 얌전히 있어서 그저 무심코 받아들였던 그런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옷을 다 벗고, 그 자체로, 자신 본래의 진짜 모습으로 나에게 오고 있었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게 만들어(이제 나는 순수한 시간, 순수하게 텅 빈 시간을 살고 있었으므로), 내가 단 한순간도 그것을 망각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그것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무게를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로 모두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그날 저녁부터 내 안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내 안에 다시 누군가가 살게 된 것이었다. 나의 내면은 마치 방처럼 휘 청소가 되고 어떤 사람이 거기에 살게 되었다.

그녀의 삶 속에서는 세계동포주의와 국제주의, 철저한 경계와 계급 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정의에 대한 논쟁들, 전략과 전술이 동반된 정치,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일들(너무도 전적으로 시대의 것이어서 곧 그 용어조차도 뜻모를 소리가 되어버릴 일들)을 하다가 나는 파멸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바로 그 일들에 계속 집착하고 있었다.  (중략)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에 매혹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 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해 있었다. (중략)
나는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나서는 삶은 삶이 아니라 반죽음이며, 권태이고, 유배이고, 시베리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 시베리아에서 여섯 달이 지난 후) 지금 나는 갑자기,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완전히 새롭고 예상치도 못했던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내 앞에는 이제 전속력으로 비상하는 역사의 날개 아래 가리워져 있던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잊혀져 있던 일상이라는 초원, 소박하고 가난한, 그러나 충분히 사랑할 만한 한 여인, 루치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그러니까 내 기억 속에서 자꾸만 그 강당, 백 명이 손을 들어 내 삶의 파탄을 결정했던 그 강당이 떠오르곤 했던 것이다. 그 백 명의 사람들은 언젠가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을 나를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중략) 추방이 아니라 교수형이 제안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곤 했다. 그랬다고 해도 모두 손을 들었으리라는 결론이 나올 뿐 다른 결론에 이르러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중략) 그러니 인정하시라. 당신을 유배보내거나 사형시킬 태세가 되어 있는 이들과 같이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그들과 친해지기가, 그들을 사랑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나는 혼란스러워하면 이 역할 저 역할 왔다갔다하던 끝에, 결국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어쩔 줄 모르다가 붙잡힌 것이다.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중략)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그리고 길을 따라 보이는 풀들은 너무도 푸르러서 손으로 쓰다듬어보지 않을 수 없다.

폭신한 풀로 덮인 땅이 등에 닿는 것이 느껴진다. 등으로 땅을 더듬어본다. 등올 땅을 꽉 받치고, 나는 땅에게 너무 무거울까봐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내 위에 온 무게를 다 싣고 기대라고 말한다.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이 떠나버린 그 처녀성의 화관을 보고 있었다. 그렇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이. 우리 삶이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데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

지금 내가 기독교인들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믿지 않는 이들과 똑같이 살고 있는 가짜 기독교인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인이란 말은 다르게 산다는 것을 뜻하는데 말이다.

그녀는 아들 녀석과 가족의 미래를 생각했다. (중략) 그 끊임없는 걱정, 내일을 위한 그리고 다음해를 위한 걱정, 하루하루 그리고 앞으로 올 세월들에 대한 걱정을 보면선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자동으로 앞으로 움직여가는 보도(시간)와 그 위에서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나)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런데 그 보도는 나보다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내가 달려가는 방향과 반대편에 있는 목적지로 서서히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중략)
과거에 최면이 걸린 나는 어떤 끈으로 거기에 자신을 묶어놓으려 하고 있다. (중략) 움직이는 자동 보도 위를 달리는 나의 그 질주만큼이나 똑같이 헛될 뿐이다. 그렇다, 내가 제마넥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넥이 "교수대 아래에서 쓴 르포"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 이 책은 몇 사람의 입장, 주인공 루드빅과 주변 인물들 (헬레나, 야로슬라브, 코스트카)의 목소리로 이야기 되고 있다. 무심함의 매력과 조소어린 농담을 즐겨하던 루드빅은 별 것 아니 한 사건(농담처럼 보낸 엽서)으로 급우들에 의해 트로츠카주의자로 몰려 정치범으로 복역하게 된다. 5년간의 탄광 및 감옥 생활 후, 루드빅은 다시 재기에 성공하나 그는 그 과거의 시간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의 매력과  농담은 외적으로 여전히 보여지나 그의 내면은 매우 불안정하며 갈등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루드빅의 복수는 제마넥의 부인인 헬레나와 간통을 통해 제마넥에게 충격을 주려하나 (제마넥은 자신의 파멸을 주도했던 인물), 제마넥과 헬레나는 이미 헤어진 것과 진배없었고, 세월이 흘러 제마넥은 과거의 생각을 가진 제마넥이 아님을 발견하고 루드빅은 충격과 패배감에 휩싸인다. 결국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루드빅의 인생 자체가 하나의 '농담'처럼 변해버린 상황. 그러나, 자신의 신조대로 열심히 살았던 친구 야로슬라브나 자신의 삶에 충실하던 헬레나의 인생들 역시 긴 시간이 지난 후에 '농담'처럼 되어버린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쿤데라는 매우 중요한 시선을 이 책에 담고 있다. 그 하나는 역사나 시대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다. 역사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맹목으로 따르는 행위, 특히 정신적으로 아직
 성숙되지 않은 젊은이들의 역사적 행위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또한, 역사 속의 개인,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농담처럼 되어버린 주인공과 주번인물들의 인생속에서 역사에 대한 어떠한 태도나 자세도 시대에 따라서는 비극적 웃음거리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존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 그 답은 없다. 그러나, 의문을 던져볼 필요는 있다는 것. 우리가 생각없이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관, 삶의 방식들을 시간의 자를 놓고 바라볼 필요는 절대적으로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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