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3일 월요일

카뮈의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중

사람은 어느 한 극단으로 쏠림으로써가 아니라 양 극단에 동시에 닿음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파스칼-


'첫 번째 편지' 중 (1943년 7월)

나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에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수단들이 있습니다.

전쟁을 경멸하면서도 투쟁을 한다는 것은, 행복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한다는 것은, (중략) 우리는 우리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에게는 마음에도, 지성에도 극복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두 가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억제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당신들과는 달리 우리는 무기를 가지고 승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억제할 것이 많았습니다. 우선 당신들과 닮은 짓을 하고 싶은 유혹부터 뿌리쳐야 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지성이 시키는 것을 모른 체하고 오직 효율성만을 중시하여 본능에 휩쓸려버리고 싶은 무엇인각가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에게 인간을 죽일 권리가 있는 것인지, 이미 충분할 만큼 가혹한 이 세상의 비참함에 또 다른 비참함을 덧보태도 되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그 모든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전에 가끔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정신이 검을 당할 수 없지만 검과 힘을 합친 정신은 한갖 검일 뿐인 검에 대해서 영원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기서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 우리 편임을 확신하고 난 우리가 이제 검을 뽑아 들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아야 했고 스스로 죽음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습니다. (중략) 사람은 스스로 대가를 지불한 것만을 제대로 소유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비싼 대가를 지불했고 앞으로 더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확신과 이유들과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패배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나라는 수많은 오류와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그 위대함의 근본인 생각을, (중략) 생각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중략) 나는 그런 나라의 국민입니다. 내 나라는 나의 어렵고 까다로운 사랑으로 사랑할 가치가 있습니다. (중략) 반대로 당신의 나라는 그 국민으로부터 그 나라에 대한 합당한 사랑, 즉 맹목의 사랑밖에는 받을 자격이 없다고 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 사랑이든 사랑만 받으면 다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이 점에서 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혁혁한 승리를 거둘 때 이미 패배한 당신이없으니, 이제 다가오는 패배 속에서 당신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 번째 편지' 중 (1943년 12월)

마음속에 확신이 생긴다고 해서 반드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오히려 나 자신입니다. (중략) 폭군과 신을 결국은 버리고 마는 힘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것은 자명함의 힘입니다. 우리가 보존해야 할 것은 인간적인 자명함입니다. (중략) 만약 의미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당신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의미 있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당신들의 희생에는 아무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치의 우선 순위가 잘못되어서 당신들이 중시하는 가치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네 나라에서는 신들조차 전쟁에 동원된 것입니다.


'세 번째 편지' 중 (1944년 4월)

그 모든 풍경들, 꽃들, 경직지들은, 세상의 땅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그 땅은 봄이 올 때마다 세상에는 당신들이 피 속에서 질식시키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편지' 중 (1944년 7월)

그러나 당신들은 기어이 일을 저질렀고 우리는 역사 속으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5년 동안, 서늘한 저녁의 새소리를 즐기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절망해야 했습니다. (중략) 5년 동안 이 땅 위에서는 아침마다 죽음의 고통이 있었고 저녁마다 투옥이 있었으며 점심때면 살육이 행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뒤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렵지만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들을 따라 전쟁에 뛰어들었으면서도 결코 행복을 잊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고함과 폭력 속에서도 우리는 행복했던 바다와 결코 잊어본 적이 없는 언덕의 추억을, 소중한 미소를 한사코 가슴속에 간직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가지 최고의 무기였습니다. 우리는 그 무기를 결코 내려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절망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토록 엄청난 불의를 당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증명해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책무입니다. (중략) 곧 동이 틀 것이고 당신들은 패배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저지르는 잔혹한 승리를 못 본 체하며 무관심했던 하늘이 당신들의 당연한 패배에도 무관심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


- '정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을 수 있다면, 이 순진한 인간의 옹호자, 카뮈가 아닐까? 나치의 불의에 대하여 그가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써내려간 산문을 보면, 모든 것이 혼돈과 파괴 속에 몰아붙여진 세계대전의 상황 속에서 분명하고 명료하게 무엇이 잘못인지를 칼로 끊는 듯한 문장 속에서 짚어가고 있다. 이 잔인한 살육과 폭력속에 그는 분명히 절망하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게 절망이 끝이 아님을 피로 적셔진 대지가 틔워내는 봄꽃처럼 인간에게 옳은 것, 정의로운 것, 인간다운 것이 옳은 승리를 결국에 이뤄낼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부럽다. 사랑할 가치가 있는 조국을 가진 카뮈. 나치 지지자에게는 아무리 싸워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조국은 사랑할 가치를 가지지 않았기에 그들의 승리는 의미가 없고 그들의 희생은 허무하다는 것을 꼬집어 내는 카뮈. 후에 불란서가 마다카스카르의 폭동에 대해 나치와 같은 불의로 대하는 것을 보고 개탄에 마지 않는 카뮈지만 이 글을 쓸 당시의 조국은 그에게는 피를 흘려 지킬 정신을 지닌 가치있는 조국이었다. 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조국을 가진 것이 나는 매우 부럽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의 독일에 대한 맹목의 사랑이 아닌 진정한 의식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나라가 나에게는 있는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그러나 이 회보라의 안개로 둘러싸인 세계 속, 그래도 찾아야 할 의미와 가치!

2014년 1월 10일 금요일

카뮈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 중

과연 공개적으로 처형을 하든지 아니면 처형하는 것이 꺼림칙하다는 것을 고백하든지 양자택일할 필요가 있다. 사회가 본보기의 필요성 때문에 사형 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스스로 그 광고를 필요불가결하게 만들어 스스로의 입장을 정당화해야 한다. 그 사회는 매번 사형 집행인의 손을 보여주어야 하며 직접, 간접으로 이 집행인이 존재하도록 만든 모든 사람들은 물론이고 과도하게 신경이 예민한 시민들도 그 손을 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스스로 무슨 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살인을 범하고 있음을 시인하는 격이 된다.

결국 사형 집행에 30회 가까이 입회해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벨라 쥐스트 Bela Just 신부처럼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사형 집행인들이 쓰는 은어는 그 추잡성과 저속성에 있어서 결코 범죄인이 쓰는 은어에 뒤지지 않는다."

사실대로의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중략) 정신적으로 수개월 내지 수년 동안, 육체적으로는 생명이 다하지 않은 채 몸뚱이가 둘로 잘리는 절망적이고도 잔인한 시간 동안 그 형벌을 당하는 사형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품위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진실이라는 품위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이형벌을 제 이름으로 불러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어떤 것인지 인정하자.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인정하자.

인간은 그가 굳게 믿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불가피한 죽음에 직면하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황무지가 되고 만다.

알코올이라는 씨앗을 파종하는 국가로 말하자면 범죄를 수확하게 되더라도 놀라서는 안 될 것이다. 하기야 국가는 그런 사실에 놀라지 않고 다만 국가가 그렇게 많은 알코올을 쏟아 부은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만족한다. 국가는 태연하게 사법권을 휘두르며 마치 채권자 같은 태도를 취한다. 양심에 꺼리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죄와 무죄를 다 밝혀낸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과학이지만 그 과학도 자신이 죽인 사람을 되살려내는 일에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두 배심원단이 정확하게 똑같은 경우는 세상에 없으므로 사형당한 사람이 어쩌면 사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중략) 그는 그 행위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시대 분위기 때문에도 사형을 당한 것이다. (중략) 이들은 시대와 풍습은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무 빨리 처형당한 유죄인이 더 이상 그토록 흉악하게 보이지 않는 날이 오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사무치게 후회하거나 망각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된다. 물론 사람들은 잊어버리는 쪽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만큼 병이 든다. 그리스인들은 범죄가 처벌받지 않으면 도시가 타락한다고 했다. 그러나 무죄가 처벌받거나 처벌이 너무 과해도 여전히 도시는 더럽혀진다.

스스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안다면 사법권은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판결을 둘러싸고 생길지도 모르는 오류를 수정할 충분한 여지를 어느 정도 남겨놓아야 옳지 않을까?

물론 인간은 선하지 않다. 인간은 그보다 더 악하거나 그보다 더 선하다. (중략)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심판자로 자처할 수 없으며 최악의 죄인이라 해도 결정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고 선고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절대적 결백을 자신할 수 없으니 말이다.

가장 피를 많이 흐르게 하는 자들은 법과 논리와 역사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는 개인으로부터 방어하는 것 이상으로 국가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한다.

이념이 지배하며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처형대가 우리에게 주는 모범이란, 인간을 죽이는 것이 유용하다고 믿게 될 때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라고 썼다.

유럽의 병은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순전히 감상적인 이런 혼동은 관대함보다는 비겁한에서 나오는 것이며, 결국은 이 세상 최악의 것을 정당화하고 만다.


-어느 사회에서나 '공공선'을 위한 이라는 국가의 법 제정 및 실행에 있어서, 그것이 과연 개개의 구성원들에게 진정한 '선'인가 하는 문제는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듯하다. 카뮈는 사형제도에 있어서의 야만성과 비형평성을 논의하며, 사형제도의 폐지를 그의 일생동안 (그의 문학작품 안에서도) 주장했다.
완전히 똑같은 재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절대적으로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없는 한, 돌이킬 수 없는 극형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 은 저지르지 말자는 것이다. '사형'은 '공식화된 살인'이며 그것이 범죄의 예방을 위해서라는 명목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글이 나에게 와 닿은 부분은 마치 당연시되어 온 국가의 법이나 정책이 개인의 권리, 자유, 존엄성을 침해할 때, 그 침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밀히 행해질 때, 그 침해가 어떤 공공의 목적이라는 명목을 달고 있으나 그 형평성이 맞지 않을 때, 그러한 때에는 구성원 개개인 그러한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바꿀 수 있도록 용기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이 에세이를 쓸 때, 비난받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는 이 제도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준 것이다. 침묵과 외면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유럽을 병들게 하듯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이 장소를 똑같이 병들게 할 것이다. 페스트의 타루가 말했듯이, 전락의 클라망스가 괴로워했듯이,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침묵하는 일을 그만둘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듯 (특히 그것이 개인의 생명에 관계되어 있을 때는...).

2014년 1월 6일 월요일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의 '슬픔의 위안' 중

그러니 배우자를 잃은 사람에게 "플러피(애완동물)를 잃어버렸을 때 내 심정이 꼭 이랬어요." 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 큰 슬픔을 겪는 사람들은 훨씬 가벼운 경험으로 자신들과 공감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다 보면 슬픔이 깊어지거나 소외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두 가지를 다 겪게 된다.

두 아이를 익사사고로 잃은 이사도라 던컨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슬픔은 사람을 죽게도 하지요."

삶은 사소한 것들이다. 그런데 슬픔은 그 사소한 것들을 비틀어 떼어내 버린다. 죽음은 사소한 것들을 베어내 버리고 난 뒤 그 자리를 공허감 대신 인식 가능한 고통의 무게로 채운다. 고통은 엄연한 실재다. 그래서 고통은 공간을 채운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존 왕"에서 콘스탄스라는 여인은 어린 아들을 잃은 뒤 그 지극한 슬픔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것은 부재라는 무거운 실재에 대한 생생한 묘사다.
슬픔은 떠나간 아이의 빈 방을 채우고,
아이의 침대에 눕고, 나와 함께 서성거리고,
아이의 귀여운 표정을 짓고,
아이가 하던 말을 흉내 내어 말하고,
아이의 사랑스럽던 몸 구석구석을 떠올리고,
아의 형상이 되어 주인 잃은 아이의 옷을 걸치네.
이 희곡은 셰익스피어 자신이 어린 외아들 햄릿을 잃은 직후에 쓴 것이다. 햄릿은 1596년에 죽었다. 그때 나이, 열한 살이었다.

위로하러 온 사람들이 이 모양이다.

그런데 때때로 사람들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거북함이라는 다리를 건너 슬픔에 빠진 타인에게 다가가는 용기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내고야 만다.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만나는 아름다움은 심장을 꿰뚫는 검과 같다.

비탄에 잠긴 사람은 비탄에 잠긴 다른 이들을 아주 예민하게 알아본다. (중략)
슬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결여되어 있을지 모르는 공감 능력을 얻는다. 공감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시대가 약화시키고 있는 한 가지 본능을 회복시킨다.
우리는 자극은 과도하고 윤리는 약화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중략) 순전히 개인주의적으로 보내는 시간을 늘려가는 기세를 함께 생각해보라. 개인용 컴퓨터와 아이팟, TV와 취향에 맞게 직접 만든 웹사이트, 조지 해리슨이 노래한 것처럼 "하루 종일, 나는 나"다. 슬픔은, 좋든 싫든,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자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

슬픔은 시작이다.

생명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슬픔을 이겨내는 사람들은 가장 정직하게 살아온 이들이다. (중략) 정직은 진실의 모든 측면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태도다.

타인과 함께 나누고 싶지 않다면 당신에게만이라도 슬픔을 털어놓으라.

그들의 마음을 달래줄 위로의 말이 전혀 없음을, 어떤 말도 진정으로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얼른 깨달았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고, 오직 있어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밧줄을 던져줄 때는 반드시 한쪽 끝을 잡고 있어라.

비탄에 젖은 이들은 이 상처와 소금기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중략) 어떤 죽음을 둘러싸고든 항상 그 상황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 여럿이 함께 경험하는 신성한 슬픔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알베르 카뮈는 일기장에 다음 세 문장을 휘갈겨썼다.
치유의 단계들.
자유의지를 잠들게 하라. 
"해야 한다"는 이제 그만.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비탄에 젖은 이에게는 늘 친절을 베풀고, 아름답고 의미 있고 소중한 감정들을 표현한다. 이 모두가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동시에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억제는 대가가 크다.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표현대로 "너무 오래 희생하면 심장이 돌처럼 굳는다."

사람은 슬프면 추위를 느낀다.

기대고 울 어깨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기대고서 언짢은 말을 할 어깨도 필요하다. 그래야 속이 후련해지니까.

골웨이 키넬의 시 "성 프란체스코와 암퇘지" (중략)
때로는 필요하리.
인간 아닌 것에게 제 사랑스러움을 일깨워주는 것도,
꽃의 이마에 손을 얻고 
말로, 또 손길로
너 사랑스럽다
다시 들려주는 것도.
스스로 축복하면 안으로 피어날 때까지.
(중략)
더러운 것들을 만지고 감상에 젖은 감정들을 정리해도 슬픔이 누그러지지 않을 때조차, 언제든 매달릴 수 있는 감동 깊은 무엇이 바로 시다. 시는 무기는 될 수 없을지 모르나, 꽤 훌륭한 방패는 될 수 있다.

슬픔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자신이 사랑한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며,
자신이 사랑한 누군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선의에서 마음을 써주지만, 결국 뒤처리를 하는 사람은 여자다.

죽음은 삶을 끝내지만
관계를 끝내지는 않는다. (로버트 앤더슨)

나는 옛날 함께 등을 꼭 붙이고 있던 누군가입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살아 있는 당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슬픔의 궤적이다. (중략) 오든은 "더 많이 사랑하는 이"라는 시에서, (중략)
모든 별이 사라지거나 진다면,
나는 배워야하리, 텅 빈 하늘을 바라보는 법을,
그 암흑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법을.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 슬픔, 상실에서 오는 슬픔, 은 치유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위로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지구의 무게보다 몇 만배 크게 느껴지는 슬픔을 떠안은 개인이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입술을 꼭 깨물고 있으라 아니면 괜찮은 것처럼 묵묵히 살라 하지는 말자. 이 책은 슬픔을 똑바로 바라보는 법부터 알려주고 있다. 사람이 슬픔과 고통과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언젠가부터 부정적인 것, 금기시되어있는 것, 심리상담가를 만나야 하는 그런 것으로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상실의 슬픔을 겪는 사람들은 혼자 집에서 그 무게를 떠안고 혼자 부정적인 생각으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며,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기를 해야하는 것이다. 감추어진 상처는 곪기 시작해 치유가 어려울 때쯤에 가서야 주변 사람들을 그 비애의 냄새를 맡으리라.

이 책은 상실의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한 번은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죽음은 인간사의 당연한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는 은폐되고 미화되어 실제로 들이닦치기 전에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어떤 일로 느껴진다. 막상 죽음이 닥치면 사람은 당황하고 어쩔 바를 몰라 그 상실에 대한 슬픔조차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장례가 모두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더 이상 주변에 아무도 없을때 결국 실감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놈은 더 모질게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되는지도... 어려운 주제이지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자신과 주변인의 상실의 슬픔을 더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직도 내 휴대전화의 목록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이름과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아마도 그 사람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이제 관계가 소원해진 그 번호를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지 않기에 나는 그 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다른 전화번호를 찾다가 마주치게 되는 그 이름을 보면 잠시 그 사람을 생각한다. 오든의 시에서 말하는 '텅 빈 하늘을 보는 법'은 아마도 그런 것지도 모르겠다. 

괴테의 '파우스트' 중

반짝이는 것은 순간만 존재할 뿐이지만,
참된 것은 후세에도 잊히지 않는 법입니다. (작가)

후세라는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나까지 나서서 후세 어쩌고저쩌고 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누가 웃겨주나요? (어릿광대)

아무리 자네가 완벽한 작품을 내놓아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걸 찢어가지고 갈 거야. (단장)

자넨 시인의 그 높은 곳에서 뭘 꿈꾸는가? 
그러면서도 극장이 만원이 되면 좋아하는 건 뭔가? (단장)

사랑에 눈이 먼 저런 바보는
잠시라도 애인을 기쁘게 해주려고
해와 달과 별까지 허공에 쏘아 올리려 한다니까. (메피스토펠레스)

이 세상에서 가장 구역질 나느 게 뭔지 아쇼.
그건 바로 절망에 빠진 악마요. (메피스토펠레스)

여기서 피 맛을 보지 않은 단도는 없어요,
건강한 신체를 먹어치우는 뜨거운 독을
뿌리지 않은 잔도 없지요.
아름다운 여인을 꾀어내지 않은 보석도
없고, 맹약을 깨고서 등 뒤에서
상대를 찌르지 않은 칼도 없지요. (만물상 마녀)

세상의 절반은 흥청망청 먹는 것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새 옷을 차려입고 자랑하려 합니다. (집사장)

이게 젊은이에게 주어진 가장 숭고한 소명이오.
세계도 내가 창조하기 전에 있지도 않았어요.
태양을 바다에서 끌어올린 것도 나이고,
나로 인해 달도 차고 이울기 시작한 거요.
낮은 내가 가는 길을 위해 꽃단장을 했고,
푸른 대지는 나를 반겨 꽃을 피웠지요.
그 첫날밤에 나의 눈짓에 따라
하늘엔 별들이 총총했던 거요.
속물근성에 사로잡혀 있는 당신들을 
해방시킨 게 누구죠? 나 말고?
반면에 나는 정신이 일러주는 대로 자유롭게 
그리고 즐겁게 내 내면의 빛을 따를 뿐이죠.
그리고 마음속 희열을 느끼며 잽싸게
눈앞의 영광을 쫓지요. 어둠을 뒤로하고서. (학사)
(퇴장)
이 괴짜 자식아, 네 영광의 길을 가거라!
이런 사실을 넌 뼈저리게 느낄 거야,
이 세상에 멍청한 것이든, 현명한 것이든
옛 사람들이 이미 생각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그래도 이런 놈은 위험할 것이 없어,
몇 년 안 돼 생각이 바뀔 거거든.
포도즙이 별별 괴상한 모습을 보여봤자
결국 남는 것은 포도주지.
(중략)
그래도 알아둬라, 악마는 나이가 무척 많아,
그러니 악마를 이해하려면 너희도 늙어야 해! (메피스토펠레스)

아무리 이런 풍요로움을 느낀다 해도
갖지 못한 한 가지가 큰 고통을 준다. (파우스트)

그는 어떤 향락, 어떤 행복에도 만족지 못했고,
늘 새로운 뭔가를 찾아 나섰다.
이 보잘것없고 공허한 마지막 순간을
잡아두려 하다니, 불쌍한 사람.
나한테는 그렇게 끈덕지게 저항하더니,
세월은 어쩔 수 없어, 이 노인 모래바닥에 누워 있다.
시계는 멈추었다. (메피스토펠레스)


- 어려서 읽어서 간략한 스토리라인 외에는 기억나지 않는, 그러나 너무도 많은 문학작품에서 회자되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다시 읽었다. 화려한 문장과 다채로운 배경, 순간 순간 바뀌는 장면들이 하나의 서사극을 보는 듯한 느낌. 그러나 나의 문학적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존경받는 지식인인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의 도움을 받이 순진한 여자를 농락하고, 그녀의 모친과 오빠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결국 그 여인과 그의 아기마저 죽음에 몰아넣고는 연민이나 탄식없이 이번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헬레네를 쫓아다니는 욕망과 색정에 물든 인간, 권력과 부를 탐하고, 그 얻은 것이 모자라 옆의 노부부의 작은 언덕을 빼앗고자 하는 탐욕, 괴테가 파우스트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잠시 등장하는 '학사'라는 인물은 마치 파우스트의 젊은 시절을 엿보게 하는 듯하다.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느껴지고 숭고한 목표에 자신을 바치는 듯한... 그러나, 메피스토펠레스가 암시하듯 인간은 세월이 지나면 결국엔 욕망과 욕심에 굴복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파우스트의 죽음 앞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인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어떤 행복에도 만족지못하고 늘 새로운 것을 탐닉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인간, 본질적으로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이 없다면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로서의 욕망을 충실히 따라간 파우스트의 삶을 추앙고자 한 것일까? 이 책에는 도덕적이며 올바른 방법은 모두 악마적인 술수에 진다. 파우스트가 여인을 얻은 것도 술수와 계략이고, 부와 권력을 차지한 것도 술수와 계략이다. 심지어 마지막에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사에게 뺏기는 것도 천사들의 술수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집필을 시작한지 70여년만에 완성하고 얼마 후 고인이 되었던 괴테 자신의 모든 것이 녹아있다는 이 대작을 아직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아마도 그가 썼던 편지에 언급되었듯이 "궁극의 성자가 아니라 위대한 인간이 나타나는 그런 진정한 종교를 향해 내가 날아갈 수 있다면......" 이라는 말처럼 그는 인간의 사랑과 욕망을 신과 악마와 견주어도 좋을 신성한 목록들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고자 하는 나에게는 카뮈나 말로의 책들이 더 와 닿는다.

2013년 12월 30일 월요일

생텍쥐베리의 '인간의 대지' 중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지리학자도 모르는 세세한 것들을 망각 속에서, 상상할 수도 없이 먼 거리에서, 끄집어냈다. 왜냐하면 지리학자들의 흥미를 끄는 건 대도시에 물을 대는 에브로 강이지, 모트릴 서쪽 풀숲에 숨어 서른 포기 남짓한 꽃을 먹여 살리는 실개천 같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월급쟁이들의 하찮은 명상에 말이다.
(중략) 병이나 돈, 집안 걱정거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 속내 이야기는 그들이 갇혀 있는 우중충한 감옥의 벽을 보여 주었다. 그러다 갑자기 운명의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여기 있는 나의 동료, 늙은 사무원이여, 누구도 그대를 탈출시켜 주지 않았다. 그대는 이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없다. 그대는 저 흰개미들이 그렇게 하듯 광명으로 빠져나갈 모든 틈새를 시멘트로 애써 틀어막고 평화를 일구었다. 그대는 소시민적인 안전 속에서, 틀에 박힌 일과 속에서, 시골 생활의 숨 막히는 관례 속에서, 공처럼 굴러다니며 바람과 조수와 별을 막기 위해 그 보잘것없는 성벽을 쌓아 올렸다. 그대는 거창한 문제로는 조금도 고민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대는 그대의 크고 작은 인간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고군분투했다. 그대는 결코 떠돌이별의 주민이 아니다. 그렇다, 그대는 툴루즈의 소시민이다. 아직 기회가 있었을 때조차 그 누구도 그대의 어깨를 붙들어 주지 않았다. 이제 그대를 빚어준 진흙은 말라 굳어 버렸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그대의 마음속에 깃들었을지 모를 잠든 음악가나 시인, 혹은 천문학자도 깨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더는 폭풍우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이 마법같은 직업이 내게 하나의 세계를 열어보여주니까. 그 세계에서 2시간 후면 나는 검은 용과 맞설 것이고, 푸른 번개 갈기를 왕관처럼 쓴 산봉우리와 대결할 것이다. 밤이 우면 나는 폭풍우에서 해방되어 별들 속에서 나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가 별들 사이의 공간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다가갈 수 없는 100개의 별들 사이에서 단 하나뿐인 진정한 별을, 우리의 별을,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과 우리의 정다운 집과 우리의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 별을 찾다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에게는 최고 5,200미터의 상승비행을 할 수 있는 비행기가 맡겨졌다. 안데스산맥의 봉우리들을 7,000미터나 솟아 있었다. 그런데도 메르모즈는 통로를 찾기 위해 이륙했다. (중략) 메르모즈는 다른 이들을 위해 '시도'를 했다.
그렇게 여러 번 '시도'를 하던 어느날, 그는 끝내 안데스 산맥으리 포로가 되고 말았다.
(중략)
그다음 날, 메르모즈는 다시 날아올랐다.
(중략)  그리고 그가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다시 출발하기 위함이었다.

한 직업의 위대함이란 어쩌면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이어주는 데 있을지 모른다. 진정한 의미의 부란 하나뿐이고, 그것은 인간관계라는 부이니까.

"이틀째부터 내가 한 가장 큰일은 생각이 떠오르는 걸 막는 일이었다네. 알겠나? 나는 너무 고통스러웠고 내 상황은 너무 절망적이었지. 걸을 용기를 얻기 위해서는 그런 상황 자체를 생각하지 말아야 했어. (중략)"
일단 일어서자 자네는 이틀 밤 사흘 낮을 내리 걸었네.

내가 보기에 우리의 급속한 기술 발전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것 같아. (중략) 하지만 기계는 목적이 아니야. 비행기는 목적이 아니라네. (중략)
모든 진보가 우리가 겨우 체득한 습관 밖으로 우리를 더 멀리 쫓아내 버렸네. (중략)
우리 모두는 아직 새 장난감에 감탄하는 젊은 야만인들에 지나지 않아. (중략) 저 비행기는 보다 높이 날고 보다 빨리 날아가지만, 우리는 왜 우리가 비행기를 날게 하는지를 잊었네. 지금은 경주가 그것의 목적보다 중시되고 있어. 언제나 마찬가지야. 제국을 건설하는 식민지군에게 삶의 의미는 정복하는 데 있지. 군인은 소작농을 무시해. 그런데 정복의 목적은 그 소작농이 정착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진보의 열광 속에서 우리는 많은 이들을 철도 부설, 공장 건설, 석유 시추 작업에 종사하도록 만들었네. 우리는 이러한 건조물을 세우는 이유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임을 망각해 버렸네. (중략) 아직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이 새집을,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네. 전자의 경우 진리란 건설하는 데 있지만, 후자의 경우 진리란 거주하는 데 있지.

그러나 나는 고독을 알았다. 사막에서의 3년은 내게 고독의 맛을 톡톡히 가르쳐주었다. 거기서는 광물의 풍경 속에서 마모되는 젊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온 세상이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늙어가는 것 같았다. (중략)
보통,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을 일시적인 평화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기항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끊임없이 불어오는 무역풍이 우리를 짓누를 때마다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우리는 어둠을 가르는 차축의 소음으로 가득한 급행열차를 탄 여행객 같았다. 창밖에서 휙휙 지나가는 불빛 몇 줌을 보고 들판이, 자기 마을이, 황홀한 풍경이 풀러가리라는 것을 짐작해 보는 여행객, 여행중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붙잡아 둘 수 없는 그런 여행객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막을 사랑했다.

사막이 일견 공허와 침묵일 뿐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하루살이 애인에게는 자신을 내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 작은 여우야, 나는 지금 절망적이란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절망적인데도 네가 어떤 성격일지 관심이 생기니 말이야......"
나는 거기서 몽상에 잠긴 채 가만히 있다. 사람이란 모든 일에 적응하기 마련인 것 같다. 30년 후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해서 한 인간의 기쁨이 엉망이 되지는 않는다. 30년이건 사흘이건...... 그것은 단지 관점의 문제다.
하지만 어떤 모습들은 잊어버려야 한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형수가 가진 담배 한 개비와 럼주 한 잔의 의미를 이해한다. (중략) 그가 관점을 바꾸어 그 마지막 순간을 인간의 일생으로 삼은 것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물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은 의심도 해보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을 걸었고, 모든 것을 잃었다. 이것이 내 직업의 생리다.

왜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는가? 우리는 서로 굳게 결속되어 있다. 같은 별에 사는 이웃이고 한 배를 탄 선원이다. 새로운 통합을 이루기 위해 문명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문명이 서로를 잡아먹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자각할 때, 아무리 하찮은 역할일지라도 그 역할을 깨달을 때, 그때에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그때에만 우리는 평화롭게 살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주니까.

배고플 때 느끼는 것, 빗발치는 사격 속에서도 스페인 군인들이 식물학 강의를 듣도록 내몰고, 메르모를 남대서양 쪽으로 내몰고, 또 누군가는 시를 쓰도록 내모는 그 배고픔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 그것은 바로 천지창조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주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는 점을 느낀다. 우리는 어둠 속으로 다리를 놓아야 한다. 우리 중 이 점을 모르는 자들은 오직 이기적인 무관심을 지혜라고 여기는 자들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들의 지혜가 거짓임을 보여 준다! 동료들이여, 나의 동료들이여, 우리는 언제 행복하다고 느꼈던가? 나는 이에 대해 말해 줄 증인으로 자네들을 세우고자 한다.

그렇게 첫 우편기를 몰게 된 새벽에, 우리를 배웅해 주던 그 늙은 사무원들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굶주렸다는 점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저 잠든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노쇠한 동물이라도 여전히 매력을 지니는 법이다. 그런데 왜 이 아름다운 인간 찰흙은 흉하게 일그러지고 만 것일까?

그래서 나는 내 열차 칸으로 돌아왔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동정심이 아니다. 끊임없이 재발하는 상처를 동정하는 일은 전혀 문제가 안된다.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저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상처를 입은 이, 피해를 받은 이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와 같은 차원에 있는 그 무엇이다. 나는 연민을 믿지 않는다. (중략) 나를 괴롭게 하는 건 사람들이 나태에 안주하듯 이러한 비참함에 결국 안주할 거란 사실이다. (중략) 그것은 바로 저 인간들 한 명 한 명 안에 있는, 죽어가는 모차르트이다.

오직 '정신'만이 진흙에 숨결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할 수 있다.


- 생텍쥐베리의 산문집, '인간의 대지' 솔직하고 담백한 문장들로 가슴을 울린다. 그의 비행에 대한 열정과 맞물린 삶에 대한 열정, 시대적 비극과 그 안의 사람들에 대한 슬픔, 일상성에 매몰되어 가는 헐벗은 인간에 대한 연민어린 멸시, 용기와 희생을 각오한 사람들에 대한 동경과 감사 등이 우주를 품은 존재로서의 인간으로서의 자각과 행동을 요구하는 그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단지 글만으로서가 아닌 자신의 삶으로서 이상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생텍쥐베리. 그의 섬세한 감성과 강한 정신이 시대를 초월해 읽는 이에게 가슴시린 설렘과 용기를 전해주는 듯하다. 사하라 사막에서의 불시착이라는 생사의 기로에 섰던 그가 써낸 글들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의미와 희망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무한히 그 깊이를 더할 것 같다. 사막을 보고 별을 보고 황혼을 보면 언제나 생각날 작가, 그가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무엇을 잃었었을까?

2013년 12월 26일 목요일

강신주의 '감정수업' 중

"부잣집 딸들이 대개 그렇듯이 관습적인 취향을 즐기는 것 말고는 다른 재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양장점이나 가구점에서 엄청난 돈을 쓰는 것뿐이었다."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중-

라캉(Jacques Lacan)의 말대로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좋은 일이란 오래가는 법이 없구나. 차라리 이게 한낱 꿈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고기는 잡은 적도 없고, 지금 이 순간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혼자 누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중 -

진정 커다란 고독이 닥쳐오고 완벽한 정적에 휩싸이면,
몽상가의 마음에도 불꽃의 핵심에도 같은 평화가 존재한다.
그때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지키며 확고한 사상처럼
수직성의 운명을 향해 똑바로 내닫는다.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에서-

과거의 아픈 기억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 어쨌든 두려움은 우리의 현재를 좀먹는 감정인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픈 기억은 우리를 과거로 봰고, 지나친 염려는 우리를 미래로 던져 버리기 때문이다. (중략)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타인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머니가 사막과도 같은 자신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 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중-

나무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림자도 그만큼 더 커지고 길어진다. 그림자의 검은빛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동시에 그는 큰 나무의 웅장함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이들은 희망이 가진 불확실성보다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갖게 되는 기쁨에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중략) 반면 어른들은 희망이 실현되었을 때의 기쁨보다는 그것이 지닌 불확실성에 더 신경을 쓴다. 여러 다양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어른들에게 이런 불확실성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어른들은 삶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기꺼이 희망을 현실이라는 제단에 바치고 만다.


- 크레마의 책장에 꽂혀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읽을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크레마의 책장을 기웃대다 노란 표지와 스피노자의 철학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와 사게 되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로서는 여러 감정을 각각의 챕터로 만들어 하나의 고전 문학과 비교해 서술해 놓은 것이 매우 새로운 시도로 여겨졌지만, 그만큼 하나의 문학작품을 하나의 감정과 비유하는 것이 무리가 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각각의 문학작품이 담고 있는 의미와 무게를 합친다면 아마도 하나의 단어로 비유되기에는 너무도 무거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스피노자의 감정에 대한 정의를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서술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각각의 감정에 대한 철학자의 어드바이스 또한 더 깊이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 인간의 48가지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용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심도있는 논의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서점 귀퉁이에서 외면받는 다양한 고전 문학에 새로운 빛을 비추어 준 것이 고맙고, 문학이나 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입문서로서는 적합한 책이라는 생각된다.

2013년 12월 5일 목요일

'A year with Rilke' edited by J. Macy & A. Barrows 중

Death is our friend precisely because it brings us into absolute and passionate presence with all that is here,


We are solitary. (skip) It can, of course, make us dizzy, for everything our eyes rest upon will be taken from us, no longer is anything near, and what is far is endlessly far.


You, sent out beyond your recall,
go the the limits of your longing.
Embody me.


What locks itself in sameness has congealed.
It is safer to be gray and numb?
What turns hard becomes rigid
and is easily shattered.

Pour yourself out like a fountain.
Flow into the knowledge that what you are seeking
finishes often at the start, and , with ending, begins.


love your solitude and bear the pain of it without self-pity. The distance you feel from those around you should trouble you no more than your distance from the farthest stars. (skip) When you see them, love life in a form that is not your own, and be kind to all the people who are afraid of their aloneness.


When I lean over the chasm of myself-
it seems
my God is dark
and like a web: a hundred roots.
silently drinking.

This is the ferment I grow out of.


From infinite longings
finite deeds arise...

But in these dancing tears,
what is often withheld can be found:
our strength.


Sometimes I have stopped spontaneously in towns along my way only to taste the delight that no living being can imagine me there. How much that added to the lightness of my soul!
I remember certain days in Cordova where I lived as if transparent, because I was completely unknown.


But in the midst of these very unfamiliar conditions your inner solitude will be a support and a home to you.


because we can't keep standing as the ground shifts under our feet. That is why the sadness passes over like a wave. (skip) That is why it is so important to be alone and attentive when you are sad: because the seemingly uneventful and motionless moment when our future steps into us is so much closer to life than any loud and accidental point of time which occurs, as it were, from the outside.


Impermanence plunges us into the depth of all Being. And so all forms of the present are not to be taken and bound in time, but held in a larger context of meaning in which we participate.


I live my life in widening circles
that reach out across the world.
I may not complete this last one
but I give myself to it.


diminishing nothing, defined by nothing outside itself,
all coming from within, clothed in softness
and radiant in its own light,


See the flowers, so faithful to Earth.
We know their fate because we share it.
Were they to grieve for their wilting,
that grief would be ours to feel.

There's lightness in things. Only we move forever burdened,
pressing ourselves into everything, obsessed by weight.
How strange and devouring our ways must seem
to those for whom life is enough.


People have even made eating into something  it is not meant to be.


Only what is within you is near; all else is far.
And this within: so packed and pressured,
barely contained, unsayable.
The island could be a star so insignificant

that space in its terrible blindness takes no note
and mindlessly destroys it.
Thus, unillumined and unheard,
expecting nothing

but that all this may yet come to an end,
it contains doggedly its self-invented course,
alone, outside the patterns made
by planets and the suns they orbit.


For the creative artist there is not impoverishment and no worthless place.


I come home from the soaring
in which I lost myself.

UNAFRAID OF WHAT IS DIFFICULT
Dont' be confused by the nature of solitude, when something inside you wants to break free of your loneliness. This very wish, when you use it as a tool for understanding, can illumine your solitude and expand it to include all that is. Bound by conventions, people tend to afraid of what is difficult. For all living things in nature must unfold in their particular way and become themselves at any cost and despite all opposition.


This is what the things can teach us:
to fall,
patiently to trust our heaviness.
Even a bird has to do that
before he can fly.


Once
for each, only once. Never again. But
to have lived even once,
to have been of Earth - that cannot be taken from us.


When you feel no commonality between yourself and other people, try to be close to Things, which will not abandon you. Nights are still there and winds that blow through the trees and over many lands.


CITIES
The people there live harsh and heavy,
crowded together, weary of their own routines.

(skip)

They don't know that somewhere
wind is blowing through a field of flowers.


Every time doubt wants to spoil something for you, ask why it finds something ugly and demand proofs.


You, my own deep soul,
trust me. I will not betray you.
My blood is alive with many voices
telling me I am made of longing.

What mystery breaks over me now?
In its shadow I come into life.
For the first time I am alone with you-

you, my power to feel.


Live for awhile in the books you love.


When I go toward you
it is with my whole life.


Why would you want to exclude from your life any uneasiness, any pain, any depression, since you don't know what work they are accomplishing within you?


SONG OF THE BEGGAR
Every so often I cradle my right ear
in my right hand.

(skip)

At times I even close my eyes
so my face can disappear.
The way it lies with its full weight in my hands,
it is almost like rest.
Then no one will think I lack a place
to lay my head.


Friends must be the ends and not the means.


Words that, against her will,
swarmed within her,
now fly around her, shrieking,


But those may be the very moments when your solitude can grow; its growing is painful as the growing of boys and sad as the beginning of the spring. But don't be confused. All that is needed is the capacity to be alone with yourself, to go into yourself and meet no one for hours - that is what you need to achieve. To be alone, the way you were as a child, when the grown-ups walked around so busy and distracted by matters that seemed important because they were beyond your comprehension.


I did not dream that such a storm of hear and spirit could come over me. That I survived it! That I survived it.

Enough. It is here.

I went outside in the cold moonlight and I caressed this little chateau Muzot as though it were a living thing - the old wall that harbored me -


Go within yourself and probe the depths from which your life springs, and there at its source you'll find the answer to the question of whether you must writie. Accept this answer, just as you hear it, without hesitation. It may be revealed that you are called to be an artist. Then take this lot upon you, and bear it, its burden and its greatness, without asking for any external reward. For the creative artist must be a world for himself, and find everything within himself - and in nature, to which he is devoted.


- 하루에 한 단락 정도의 발췌문을 읽도록 모아논 365 개의 릴케의 문장들을 잠들기 전 읽은지 한 달 정도 지났다. 지난 달의 피폐한 글과 책 속에서 이 글들을 정리하는 시간은 나의 정신을 가다듬고 보듬는 시간이 된 듯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말테의 수기를 쓴 사람의 절망을 아는 사람이 이토록 희망의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의 문장은 너무도 아름답고도, 슬프면서도, 강하고, 진실되다.
혼돈, 대립, 갈등, 고독 모든 것을 위대한 글을 위한 재료로 삼을 수 있는 강한 영혼을 가졌던 릴케를 동경하며, 그가 준 문장 속에서 한때는 바닥에 내팽겨쳤던 희망을 다시 주워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