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6일 월요일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의 '슬픔의 위안' 중

그러니 배우자를 잃은 사람에게 "플러피(애완동물)를 잃어버렸을 때 내 심정이 꼭 이랬어요." 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 큰 슬픔을 겪는 사람들은 훨씬 가벼운 경험으로 자신들과 공감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다 보면 슬픔이 깊어지거나 소외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두 가지를 다 겪게 된다.

두 아이를 익사사고로 잃은 이사도라 던컨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슬픔은 사람을 죽게도 하지요."

삶은 사소한 것들이다. 그런데 슬픔은 그 사소한 것들을 비틀어 떼어내 버린다. 죽음은 사소한 것들을 베어내 버리고 난 뒤 그 자리를 공허감 대신 인식 가능한 고통의 무게로 채운다. 고통은 엄연한 실재다. 그래서 고통은 공간을 채운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존 왕"에서 콘스탄스라는 여인은 어린 아들을 잃은 뒤 그 지극한 슬픔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것은 부재라는 무거운 실재에 대한 생생한 묘사다.
슬픔은 떠나간 아이의 빈 방을 채우고,
아이의 침대에 눕고, 나와 함께 서성거리고,
아이의 귀여운 표정을 짓고,
아이가 하던 말을 흉내 내어 말하고,
아이의 사랑스럽던 몸 구석구석을 떠올리고,
아의 형상이 되어 주인 잃은 아이의 옷을 걸치네.
이 희곡은 셰익스피어 자신이 어린 외아들 햄릿을 잃은 직후에 쓴 것이다. 햄릿은 1596년에 죽었다. 그때 나이, 열한 살이었다.

위로하러 온 사람들이 이 모양이다.

그런데 때때로 사람들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거북함이라는 다리를 건너 슬픔에 빠진 타인에게 다가가는 용기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내고야 만다.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만나는 아름다움은 심장을 꿰뚫는 검과 같다.

비탄에 잠긴 사람은 비탄에 잠긴 다른 이들을 아주 예민하게 알아본다. (중략)
슬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결여되어 있을지 모르는 공감 능력을 얻는다. 공감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시대가 약화시키고 있는 한 가지 본능을 회복시킨다.
우리는 자극은 과도하고 윤리는 약화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중략) 순전히 개인주의적으로 보내는 시간을 늘려가는 기세를 함께 생각해보라. 개인용 컴퓨터와 아이팟, TV와 취향에 맞게 직접 만든 웹사이트, 조지 해리슨이 노래한 것처럼 "하루 종일, 나는 나"다. 슬픔은, 좋든 싫든,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자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

슬픔은 시작이다.

생명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슬픔을 이겨내는 사람들은 가장 정직하게 살아온 이들이다. (중략) 정직은 진실의 모든 측면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태도다.

타인과 함께 나누고 싶지 않다면 당신에게만이라도 슬픔을 털어놓으라.

그들의 마음을 달래줄 위로의 말이 전혀 없음을, 어떤 말도 진정으로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얼른 깨달았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고, 오직 있어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밧줄을 던져줄 때는 반드시 한쪽 끝을 잡고 있어라.

비탄에 젖은 이들은 이 상처와 소금기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중략) 어떤 죽음을 둘러싸고든 항상 그 상황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 여럿이 함께 경험하는 신성한 슬픔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알베르 카뮈는 일기장에 다음 세 문장을 휘갈겨썼다.
치유의 단계들.
자유의지를 잠들게 하라. 
"해야 한다"는 이제 그만.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비탄에 젖은 이에게는 늘 친절을 베풀고, 아름답고 의미 있고 소중한 감정들을 표현한다. 이 모두가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동시에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억제는 대가가 크다.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표현대로 "너무 오래 희생하면 심장이 돌처럼 굳는다."

사람은 슬프면 추위를 느낀다.

기대고 울 어깨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기대고서 언짢은 말을 할 어깨도 필요하다. 그래야 속이 후련해지니까.

골웨이 키넬의 시 "성 프란체스코와 암퇘지" (중략)
때로는 필요하리.
인간 아닌 것에게 제 사랑스러움을 일깨워주는 것도,
꽃의 이마에 손을 얻고 
말로, 또 손길로
너 사랑스럽다
다시 들려주는 것도.
스스로 축복하면 안으로 피어날 때까지.
(중략)
더러운 것들을 만지고 감상에 젖은 감정들을 정리해도 슬픔이 누그러지지 않을 때조차, 언제든 매달릴 수 있는 감동 깊은 무엇이 바로 시다. 시는 무기는 될 수 없을지 모르나, 꽤 훌륭한 방패는 될 수 있다.

슬픔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자신이 사랑한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며,
자신이 사랑한 누군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선의에서 마음을 써주지만, 결국 뒤처리를 하는 사람은 여자다.

죽음은 삶을 끝내지만
관계를 끝내지는 않는다. (로버트 앤더슨)

나는 옛날 함께 등을 꼭 붙이고 있던 누군가입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살아 있는 당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슬픔의 궤적이다. (중략) 오든은 "더 많이 사랑하는 이"라는 시에서, (중략)
모든 별이 사라지거나 진다면,
나는 배워야하리, 텅 빈 하늘을 바라보는 법을,
그 암흑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법을.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 슬픔, 상실에서 오는 슬픔, 은 치유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위로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지구의 무게보다 몇 만배 크게 느껴지는 슬픔을 떠안은 개인이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입술을 꼭 깨물고 있으라 아니면 괜찮은 것처럼 묵묵히 살라 하지는 말자. 이 책은 슬픔을 똑바로 바라보는 법부터 알려주고 있다. 사람이 슬픔과 고통과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언젠가부터 부정적인 것, 금기시되어있는 것, 심리상담가를 만나야 하는 그런 것으로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상실의 슬픔을 겪는 사람들은 혼자 집에서 그 무게를 떠안고 혼자 부정적인 생각으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며,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기를 해야하는 것이다. 감추어진 상처는 곪기 시작해 치유가 어려울 때쯤에 가서야 주변 사람들을 그 비애의 냄새를 맡으리라.

이 책은 상실의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한 번은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죽음은 인간사의 당연한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는 은폐되고 미화되어 실제로 들이닦치기 전에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어떤 일로 느껴진다. 막상 죽음이 닥치면 사람은 당황하고 어쩔 바를 몰라 그 상실에 대한 슬픔조차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장례가 모두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더 이상 주변에 아무도 없을때 결국 실감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놈은 더 모질게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되는지도... 어려운 주제이지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자신과 주변인의 상실의 슬픔을 더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직도 내 휴대전화의 목록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이름과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아마도 그 사람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이제 관계가 소원해진 그 번호를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지 않기에 나는 그 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다른 전화번호를 찾다가 마주치게 되는 그 이름을 보면 잠시 그 사람을 생각한다. 오든의 시에서 말하는 '텅 빈 하늘을 보는 법'은 아마도 그런 것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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