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0일 금요일

카뮈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 중

과연 공개적으로 처형을 하든지 아니면 처형하는 것이 꺼림칙하다는 것을 고백하든지 양자택일할 필요가 있다. 사회가 본보기의 필요성 때문에 사형 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스스로 그 광고를 필요불가결하게 만들어 스스로의 입장을 정당화해야 한다. 그 사회는 매번 사형 집행인의 손을 보여주어야 하며 직접, 간접으로 이 집행인이 존재하도록 만든 모든 사람들은 물론이고 과도하게 신경이 예민한 시민들도 그 손을 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스스로 무슨 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살인을 범하고 있음을 시인하는 격이 된다.

결국 사형 집행에 30회 가까이 입회해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벨라 쥐스트 Bela Just 신부처럼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사형 집행인들이 쓰는 은어는 그 추잡성과 저속성에 있어서 결코 범죄인이 쓰는 은어에 뒤지지 않는다."

사실대로의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중략) 정신적으로 수개월 내지 수년 동안, 육체적으로는 생명이 다하지 않은 채 몸뚱이가 둘로 잘리는 절망적이고도 잔인한 시간 동안 그 형벌을 당하는 사형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품위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진실이라는 품위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이형벌을 제 이름으로 불러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어떤 것인지 인정하자.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인정하자.

인간은 그가 굳게 믿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불가피한 죽음에 직면하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황무지가 되고 만다.

알코올이라는 씨앗을 파종하는 국가로 말하자면 범죄를 수확하게 되더라도 놀라서는 안 될 것이다. 하기야 국가는 그런 사실에 놀라지 않고 다만 국가가 그렇게 많은 알코올을 쏟아 부은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만족한다. 국가는 태연하게 사법권을 휘두르며 마치 채권자 같은 태도를 취한다. 양심에 꺼리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죄와 무죄를 다 밝혀낸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과학이지만 그 과학도 자신이 죽인 사람을 되살려내는 일에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두 배심원단이 정확하게 똑같은 경우는 세상에 없으므로 사형당한 사람이 어쩌면 사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중략) 그는 그 행위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시대 분위기 때문에도 사형을 당한 것이다. (중략) 이들은 시대와 풍습은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무 빨리 처형당한 유죄인이 더 이상 그토록 흉악하게 보이지 않는 날이 오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사무치게 후회하거나 망각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된다. 물론 사람들은 잊어버리는 쪽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만큼 병이 든다. 그리스인들은 범죄가 처벌받지 않으면 도시가 타락한다고 했다. 그러나 무죄가 처벌받거나 처벌이 너무 과해도 여전히 도시는 더럽혀진다.

스스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안다면 사법권은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판결을 둘러싸고 생길지도 모르는 오류를 수정할 충분한 여지를 어느 정도 남겨놓아야 옳지 않을까?

물론 인간은 선하지 않다. 인간은 그보다 더 악하거나 그보다 더 선하다. (중략)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심판자로 자처할 수 없으며 최악의 죄인이라 해도 결정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고 선고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절대적 결백을 자신할 수 없으니 말이다.

가장 피를 많이 흐르게 하는 자들은 법과 논리와 역사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는 개인으로부터 방어하는 것 이상으로 국가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한다.

이념이 지배하며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처형대가 우리에게 주는 모범이란, 인간을 죽이는 것이 유용하다고 믿게 될 때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라고 썼다.

유럽의 병은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순전히 감상적인 이런 혼동은 관대함보다는 비겁한에서 나오는 것이며, 결국은 이 세상 최악의 것을 정당화하고 만다.


-어느 사회에서나 '공공선'을 위한 이라는 국가의 법 제정 및 실행에 있어서, 그것이 과연 개개의 구성원들에게 진정한 '선'인가 하는 문제는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듯하다. 카뮈는 사형제도에 있어서의 야만성과 비형평성을 논의하며, 사형제도의 폐지를 그의 일생동안 (그의 문학작품 안에서도) 주장했다.
완전히 똑같은 재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절대적으로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없는 한, 돌이킬 수 없는 극형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 은 저지르지 말자는 것이다. '사형'은 '공식화된 살인'이며 그것이 범죄의 예방을 위해서라는 명목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글이 나에게 와 닿은 부분은 마치 당연시되어 온 국가의 법이나 정책이 개인의 권리, 자유, 존엄성을 침해할 때, 그 침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밀히 행해질 때, 그 침해가 어떤 공공의 목적이라는 명목을 달고 있으나 그 형평성이 맞지 않을 때, 그러한 때에는 구성원 개개인 그러한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바꿀 수 있도록 용기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이 에세이를 쓸 때, 비난받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는 이 제도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준 것이다. 침묵과 외면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유럽을 병들게 하듯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이 장소를 똑같이 병들게 할 것이다. 페스트의 타루가 말했듯이, 전락의 클라망스가 괴로워했듯이,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침묵하는 일을 그만둘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듯 (특히 그것이 개인의 생명에 관계되어 있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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