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9일 목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3부 대타존재, 제2장/제3장 -

제2장 몸

나의 몸을 '살아간다.'

하나의 몸을 가지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의 근거로 있는 것이고, 자기 존재의 근거로 있지 않은 것이다. '내가' 나의 몸'인 것은' 내가 존재하는 한에서이다. 내가 나의 몸으로 '있지 않는 것은' 내가 나의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지 않는 한에서이다. 내가 나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의 무화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나의 몸을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벗어나는 것은, 끊임없이 내가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부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이며,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자기를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힘들어 하고 있는 이 병든 몸마저도, 내가 살아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에 의해, 나는 그것을 몸에 떠맡은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시도를 향해 병든 몸을 뛰어넘는다. 나는 병든 몸을 나의 존재에서의 필연적인 장애가 되게 한다. 내가 병든 나를 선택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내가 어떤 방법으로 나의 병든 몸을 구성할지 ('견딜 수 없는 것'으로서, '굴욕적인 것'으로서, '숨겨야 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야 하는 것'으로서, '자존심의 대상'으로서, '내 실패의 핑계' 등으로서 구성할지) 선택하지 않는 한, 나는 병든 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파악한 몸은, 바로 '하나의 선택이 그곳에 존재한다'고 하는 필연성, 다시 말해 '나는 "단번에 모든 선택"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필연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유한성의 내 자유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선택이 없는 곳에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세계에 대한 순수의식으로서의 의식을 조건짓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몸은 의식을 바로 그 자유 자체 속에서도 가능하게 한다.

오히려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타동사로 사용하여, '의식은 그 몸을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몸에 대한 의식은 측면적이고 회고적이다.

만일 내가 아무리 독서에 열중해 있더라도, 나는 세계를 존재에 이르게 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독서는 자신의 본성 자체 속에 하나의 필연적인 배경으로서 세계의 존재를 내포하는 하나의 행위이다. 그렇다고, 내가 세계에 대한 의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오히려 내가 세계를 '배경으로서'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색깔과 운동을 놓치지 않는다. 온갖 소리가 끊임없이 나에게 들려온다. 다만, 그런 것들은 나의 독서 배경을 이루고 있는 무차별적인 전체 속에 사라지고 있다.

내가 아무리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끝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떨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맛, '나의' 그 무미건조한 맛을 나의 대자에 의해 끊임없이 파악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다른 곳에서 <구토>라는 이름 아래 써던 바로 그것이다.



제3장 타자와의 구체적인 관계

타자는 나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다.' 그런 자로서 타자는 내 존재의 비밀을 쥐고 있다. 타자는 내가 '무엇인지'[내가 그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 존재의 깊은 의미는 나의 밖에 있고, 하나의 부재 속에 갇혀 있다. 타자는 나에 대해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1) 그래서 '내가 그것으로 있으면서 그것에 근거를 부여할 수 없는 즉자'로부터 내가 도피하는 한에서, 밖으로부터 나에게 부여된느 이 존재를 부정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이번에는 내 쪽에서 타자에게 대상 존재를 부여하기 위해 타자 쪽으로 다시 돌아설 수 있다. 왜냐하면, 타자의 대상 존재는 타자에게 있어서 나의 대상성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런 반면, 자유로서의 타자가 나의 즉자 존재의 근거인 한에서, 나는 타자에게서 자유라고 하는 그 성격을 없애지 않은 채, 그 자유를 회복하고, 그 자유를 빼앗으려고 시도할 수 있다. 사실, 만일 내가 나의 즉자존재의 근거인 자유를 내 것으로 할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나 자신의 근거가 될 것이다. 한쪽은, 타자의 초월을 초월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반대로 타자로부터 초월이라고 하는 그 성격을 없애지 않고 그 초월을 내 안에 삼켜버리는 것이다. (중략) 나는 내 존재의 근원 자체에 있어서 타자를 대상화하려고 하는 기투, 또는 타자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기투이다.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런 두 가지 시도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 한쪽은 다른 쪽의 죽음이다.  (중략) 우리는 우선 대자가 타자의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할 때의 태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1. 타자에 대한 첫번째 태도 - 사랑.언어.마조히즘

의식이라고 하는 자격에 있어서, 타자는 나에 대해, 나에게서 나의 존재를 훔친 자인 동시에, 나의 존재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를 '거기에 존재하게' 하는 자이다. (중략) 즉 나는 내 대타-존재의 책임자이기는 하지만 내 대타-존재의 근거는 아니다.

분명히 사랑은 '의식'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을 설명하는 데 자주 쓰이는 '소유'라는 이 관념은, (중략) 그러나 거기에는 바로 어떤 종류의 아유화(appropriation)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 경우 우리는 자유로서의 한에서의 타인의 자유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타인 속에서 쉰다. (중략) 나는 욕망되기를 원한다. (중략) 자신이 이미 하나의 '대상' 이외에, 즉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즉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를 시도한다. 


사랑받고 싶다는 나의 요구에 있어서, 타자에 대한 사실적 한계인 이 사실성, 결국 마지막에는 '그 자신의' 사실성이 될 이 사실성은 '나의' 사실성이다. (중략) 그러므로 사랑받고 싶어하는 것은 타인을 그 사실성에 감염시키는 일이며, 복종하고 자기를 구속하는 하나의 자유[타자의 자유]의 조건으로서 끊임없이 우리를 재창조하도록 타인을 강제하려고 하는 일이다. 그것은 자유가 사실에 근거를 부여하고자 하는 동시에, 사실이 자유에 대해 우위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많일 이 결과가 이룩될 수 있다면, 그 결과로서 가장 먼저 나는 '타인'의 의식 속에서 '안전하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상대는 '시선'이다.

유혹한다는 것은 타자의 시선 밑에 나를 두는 일이며, 타자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만드는 일이다. 유혹한다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 '보이게 되는' 위험을 범하는 일이고, 나의 대상존재에 의해, 또 나의 대상존재 안에서, 타인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는 나의 '존재'를 잃고, 나는 나 자신의 책임에, 나 자신의 존재 가능에 맡겨진다.

타인의 타성을 그에게 보존하게 한 채로 이 타인을 흡수하려는 대신, 나는, 나를 타자가 흡수하도록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주관성에서 탈출하고자 타인의 주관성 속에 자기를 잃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 시도는 구체적인 면에서는 '마조히스트'적인 태도로 나타날 것이다.

2. 타자에 대한 두 번째 태도 - 무관심.욕망.증오.사디즘

타인의 절대적인 주관성을 함께 무시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안심한다. 나는 '뻔뻔스러워'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타인의 시선이 나의 가능성들이나 나의 몸을 응고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중략)
세상에는 '타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도 없이 - 순간적인 무서운 번뜩임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 죽어가는 인간이 있다. 그러나 완전히 그런 상태에 빠져 있을 때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 불충분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이 없으면, (중략) 나는 '태어났는데'도 나를 존재시키는 배려를 나 혼자에게밖에 맡겨둘 수 없다고 하는 이 사실을, 완전히 알몸 그대로 파악하게 된다.

타인의 '대아-대상성'을 통해 '타인'의 자유로운 주관성을 빼앗으려 하는 하나의 근원적인 시도는 '성적 욕망'이다.

나는 하나의 인간존재를 원하는 것이지, 한 마리의 곤충이나 연체동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내가 인간존재를 원하는 것은, 그 인간존재가, 그리고 내가, 세계 속에, 상황 속에 존재하는 한에서이며, 그 인간존재가 나에게 있어서 한 사람의 '타인'이고, 또 내가 그에게 있어서 한 사람의 '타인'인 한에서이다.

사디스트가 두 손으로 반죽하고, 자신의 주먹 아래 굴복시키려 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이다.

3. '함께 있는 존재'(공동존재)와 '우리'

'우리'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때 군중들 속에서 사랑의 근원적인 기도를 되찾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자기 자신의 책임이 아니다. 이 사람이 제삼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삼자가 집단을 위해 자기의 자유를 희생함으로써 집단 전체를 그 대상존재 자체 속에서 구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적인 '우리'는 - '대상-우리'로서의 한에서 - 이를 수 없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각각의 개별적인 의식에 제시된다. 그런데도 각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원둘레를 계속 확대해 감으로써 인류적인 '우리'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인류적인 '우리'는 하나의 공허한 개념에 머물며, 우리라고 하는 말의 통상적인 사용을 가능한 한 확장한 것에 대한 하나의 단순한 지시이다.

이 가능성들의 이런 기투는 세계의 형상을 정적으로 규정한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기도는 순간마다 세계를 변화시킨다.

- 샤르트르의 '몸'에 대한 논의는 대단히 유용하다. 그는 '의식이 몸을 살아간다'라는 것으로 존재를 정의함으로써, 의식을 몸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대부분 사람들은 몸에 의해 많은 생각들이 지배받는다. 그러나, 샤르트르는 우리가 의식으로서 인정하기 전까지 이 몸에 의해 발생되는 많은 것들은 대자에게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의식에게 몸에 대한 주도권을 넘기고, 많은 부분에서의 몸에 대한 진정한 통제가 가능해진다.
또한, 타인에 대한 관계에서의 샤르트르의 고찰은 어느정도 시니컬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인정하기 어려운 진실을 많은 부분 반영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포장지 아래 인간의 자유로운 의식을 서로 쟁취하려는 혹은 자유로운 의식을 타인에게 홀라당 주어버리는 (타인의 의식에 자리를 얻기 위해) 행위는 말하여지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존재는 홀로 존재의 증명일 수 없으므로 타인의 의식에 자리를 차지하여 자신의 존재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을 암암리에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쟁탈/헌납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더 커 갈 것이다. (특히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근거가 전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는 나에 대한 자신의 의식이 아니라, 나에 대한 타인의 판단의 내 존재의 의미가 되므로 매우 위험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존재근거를 집단적 목표에서 찾으려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없다. 소위 이념적 집단 행동들이 많은 경우 이러한 존재의 약점에 근거하고 있다. 개인에게 존재를 던질 정도로 중요했던 이념적 집단 행동이 세월이 지나면, 아무 의미도 없이 퇴색되어 버리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스스로 존재를 세우고, 타인의 자유로운 의식에서 진정으로 인정받을 때, 진정한 존재의 근거를 찾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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