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7일 화요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 - 제2부 대자존재, 제3장 초월 -

그래서 결굴 인식과 인식하는 것 자체는, 존재는 '존재한다'는 사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주어지며', 존재가 없는 것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떠올라 온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식은 다만 존재가 '거기 있게' 할 따름이다.

'인식하다'와 '존재하다'의 내적인 관계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말은 우리가 방금 존재론적 의미와 인식론적 의미를 이중으로 부여하여 사용한 '이루다(realize, 실감하다)'라는 말이다.

내가 항상,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 저편에서, 나 자신에게 장차 와야 할 것으로 있는 한에서, 내가 현전하고 있는 '이것'은, 내가 나 자신을 향해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것으로서 나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갖가지 도구의 무한지향은, 결코 내가 있는 그대로의 대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면 갖가지 도구의 전체는 나의 모든 가능의 엄밀한 상관자이다. 게다가 나는 나의 모든 가능성으로 '있으므로' 세계 속에서의 갖가지 도구의 질서는 나의 모든 가능성이, 즉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이 즉자 속에 투영된 영상이다. (중략) 그것은 오히려 '세계-속-존재'는 인간존재에 있어서, 세계를 그곳에 있게 하는 드러내 보임 그 자체에 의해, 근본적으로 세계 속에 자기를 상실하는 일이다. '세계-속-존재'라는 것은 느슨해지는 일 없이, '무언가 도움이 될' 가능성조차 없이, 도구에서 도구로 지향되며, 반성적인 순환 이외에 아무런 의지처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 경우에 '"목적이 되는 무엇인가"의 연쇄는 "목적이 되는 누군가"에 이르러 정지된다'는 말로, 우리에게 이론을 제기해 보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중략)
'목적이 되는 누군가'는, 도구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즉자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중략) 이것은 우리가 항상 타인을 하나의 특수한 형식의 도구로서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다만 우리가 세계에서 출발하여 타인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도구 복합의 무한지향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대자가 자기를 향한 그 비약과 상관적으로, 거부로서 자기 자신의 결여로 있는 한에서, 존재는 세계라는 배경 위에 대자에 대해 '사물-도구'로서 드러내 보여지며, 세계는 도구성이라는 지시적 복합의 무차별적인 배경으로서 나타난다. (중략)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살고 있다. '생활 - 노동'이라는 이 전체의 '의미'에 대한 문제, 즉 '살고 있는 내가 일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이 일하기 위한 일이라면, 어째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것이 대자 자신에 의한 대자의 발견을 품고 있기 때문에 반성적 차원에서밖에 제기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부정은 '반사-반사하는 것'의 존재방식에서는, 자신이 그것으로 있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것'에 '대한' 부정으로서, 현실 존재에 대해 나타나며, 또 이 부정은 자신이 존재 속에서 장래를 향해 과거에 도전함으로써, '이것'에서 자기를 해방하기 '위해' 과거에서 탈출한다. 이것을 우리는 세계에 대한 대자의 관점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대자는 세계로부터의 이중의 도피이다. 대자는 하나의 세계에 대한 현전으로서, 세계 한복판에서의 자신의 존재에서 탈출하는 동시에, 자신이 현전하고 있는 그 세계에서 도피하낟. 가능은 이런 도피의 자유로운 종착점이다. (중략) 오히려 대자는, 다만 자신이 그것으로 있는 하나의 초월적인 것을 향해 도피할 수 있을 뿐이다. (중략) 진부한 비유이나마, 내 생각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의 비유를 쓰는 것이 허락된다면, 끌채의 멍에목에 매달려 있는 당근을 쫓아 가느라고, 뒤에 있는 수레를 끌고 가는 당나귀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기 바란다. 당근을 덥석 물려는 당나귀의 모든 노력은 결과적으로 수레 전체를 전진하게 만들지만, 당근 자체는 언제까지나 당나귀로부터 같은 거리에 머물러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의 가능을 쫓아서 달리지만, 이 가능은, 우리의 질주 자체가 나타나게 하는 가능이며, 우리의 질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가능은 우리의 손이 미치지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달리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달리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종착점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그쪽을 향해 달리는 정도에 따라 고안되고 투영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는 질주가 내던져 버리는 이 의의를 질주에 주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가능은 대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도피의 의미는 존재하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


- 세계에서 인지되고 있는 인간존재에 대한 '도구성'은 슬프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부분은 내가 너무도 혐오하고 벗어나려고 노력하려 했던 사실이다. 나는 '조직 속의 인간', '인간의 도구화'가 무엇보다 싫었다. 존재의 가치가 그 존재가 가진 도구적인 부분에 의해 판단되는 것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이러한 도구적인 인간은 본질적 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도구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과학화된 현대사회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전적으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 인간이 수행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일들은 쉽게 다른 인간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인간의 본질적 요소에 기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의 도구적 요소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직속에서 떠났다. 그러나, 세계는 여전히 나를 도구로 보고 있다. 아직은 유용한 도구. 세계가 요구하는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나 스스로 그 도구적 유용성을 사용하기 거부하는 도구.
그러나, 그 세계에서 존재의 현전에 대한 초월적 도피가 (당근을 쫓아가는 당나귀에 질주에 비유되어 조소를 자아내더라도), 그 도피, 그 '질주'가 분명 용기있고, 의미있는 일임을, 인간존재로서 세계에 대항해 내던질 수 있는 '존재로서의 존엄성'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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