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9일 월요일

지드의 "새로운 양식" 중

내가 이미 이 지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내 입술이 이 지상의 이슬을 마시지 못하게 될 때 태어날 그대 - 어쩌면 훗날 나의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를 그대 -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그대를 위해서이다. 아마도 그대가 산다는 것에 대하여 충분한 경의를 느끼지 못할 것이기에, 그대의 삶이라고 하는 그 경탄할 만한 기적을 제대로 찬탄하지 못할 것 같기에 말이다. 가끔 내게는, 그대가 나의 목마름을 가지고 물을 마시려는 것만 같고, 그대로 하여금 저 다른 존재를 애무하며 그에게로 쏠리게 하는 것은 이미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욕망인 것만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저마다의 동물은 한 뭉치의 기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존재하기를 좋아하고 모든 존재는 기뻐한다. 그 기쁨이 단맛이 들면 그대는 과일이라 부르고 그 기쁨이 노래가 되면 새라고 부른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하여 태어났음을 물론 자연의 모든 것이 가르쳐주고 있거늘, 식물이 싹 트게 하고 벌집에 꿀을 채우고 인간의 마음에 선의를 채워놓는 것은 모두가 쾌락을 향한 노래인 것이다.

나는 시대와 별 접촉이 없다. 그래서 동시대 사람들의 유희가 내겐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나는 현재의 저 너머에 관심이 있다. 나는 더 멀리 간다.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사활이 걸린 것처럼 보이는 것이 거의 이해가 되지 않게 될 어떤 시대가 오게 된다고 예감한다.

변덕스러운 영혼이여, 서둘러라! 가장 아름다운 꽃은 또한 가장 빨리 시든다는 사실을 알라. 그 꽃의 향기를 어서 빨리 허리 굽혀 맡아보라. 영원불멸인 것에는 향기가 없는 법.

비틀거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이론의 난간에 꼭 매달린다. 이론은 이론이고 이론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냥 걷는 것은 싫다. 도약하고 싶다.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나의 과거를 밀어내고 부정하고 싶다. 더 이상 약속 같은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나는 너무 많은 약속을 한 것이다! 미래여, 나는 마음 변하면서 너를 사랑하고 싶다!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어떤 '문제들'은 물론 무의미하지는 않겠지만 완전히 해결 불가능한 것이다. - 그러니 그 해결에 따라 우리의 결정을 내리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그냥 지나가 버리자.
(중략)
이 거추장스러운 짐을 얼른 수화물 보관소에 맡겨놓자. 그리고 에두아르처럼 곧 그 보관증을 잃어버리고 말자.

오랫동안 나는 신이라는 말을 나의 극히 모호한 관념들을 부어 넣는 일종의 쓰레기통으로 사용해 왔음을 인정한다.......(중략)......내가 신을 생각하기를 멈추면 신은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이었다.

어떤 진화론자가 과연 애벌레와 나비 사이에 그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상정하겠는가 - 그게 바로 똑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말이다.
(중략)
그러나 인간이란 항상 있는 기적에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중략)
"너 자신을 알라." 위험한 동시에 추악한 격언이다. 스스로를 관찰하는 자는 누구든 발전을 멈춘다. '자신을 잘 알려고' 애쓰는 애벌레는 절대로 나비가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행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젊은 시절에 내가 할 수도 있었고 했어야 옳았으나 모랄 때문에 하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후회다. 지금은 더 이상 신뢰하지도 않는 모랄, 자신의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데서 긍지를 느낄 정도로 나에게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이면서도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좋다고 믿었던 그 모랄 때문에 말이다.
(중략)
오늘 내가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몇 가지 유혹에 졌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다른 유혹들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그 유혹들이 이미 매력을 잃고 나의 사고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청춘을 어둡게 만든 것을, 현실보다 공상을 더 좋아했던 것을, 삶에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을 후회한다.

오! 우리가 하지 못한 모든 것, 그러나 우리가 할 수도 있었을 모든 것...... 하고 이승을 떠나려는 순간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했어야 마땅한 모든 것, 그러나 우리가 하지 못한 모든 것! 체면 걱정 때문에, 기회를 기다리다가, 게을러서, 그리고 "제길! 시간이 좀 먹나." 하는 생각만 줄곧 하고 있다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매일 매일,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을 매 순간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결심, 노력, 포옹을 뒤로 미루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만다.
오! 뒤에 올 그대는 보다 민첩해져서 순간을 놓치지 말라!하고 그대들은 생각할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적 지점에, 시간 속의 이 정확한 순간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 지점이 결정적이지 않은 것을 허락할 수 없다. 나는 두 팔을 한껏 길게 뻗어본다. 나는 말한다. 여기가 남쪽, 여기가 북쪽....... 나는 결과다. 나는 원인이 될 것이다. 결정적인 원인이!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하나의 기회!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존재하는 이유를 찾아내고 싶다. 나는 내가 왜 사는가를 알고 싶다.

남에게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최악의 비겁한 짓들을 하게 된다.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공포감을 실제로 불러일으킬 만큼 두려운 괴물은 극히 드물다.

나는 인간을 축소시키는 모든 것을 미워한다.

그들의 지혜?......아! 그들의 지혜라면 대단한 양 떠들어 대지 않는 게 좋다.
그것은 만사를 경계하고 위험을 피한 채 최소한으로 사는 것이니 말이다.
그들의 충고에는 항상 굳어지고 괴어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오직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뿐이다......(중략)...... 그렇다, 내가 비록 등불을 별이라고 인정하지 않아도 나의 하늘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내가 유령들에게 인도받지 않고 오로지 현실만을 사랑한다 해도 나의 의지는 결코 약해지지 않는다.

선별하는 미덕.

-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 나는 사람이 죽는 걸 봤어...... 내가 본 바로는 대개 죽기 직전, 단말마의 고통이 지나고 나면 자극에 대한 감각이 흐릿해지는 순간이 있지. 죽음이 푹신한 장갑을 끼고 달려드는 거야. 반드시 잠이 들게 하면서 목을 조이는 법이야.
(중략)
그렇지만 자신의 삶을 가득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 죽음이란 끔찍한 거야. 그런 사람에게 종교는 때를 만났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지. "걱정하지 마라. 진짜는 저쪽 세상에서 시작인 거야. 넌 거기 가서 보상을 받게 돼." 그러나 살아야 할 곳은 바로 여기 '이승'인 것이다.

동지여, 아무것도 믿지 말라. 증거가 없이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말라.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입증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형편없는 종교라 할지라도 나름대로의 순교자들이 있었으며 하나같이 열광적인 신념들을 불러일으켰다.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은 죽고,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다. 알려는 욕망은 의혹에서 생겨난다. 믿는 것을 그치고 앎을 얻도록 하라. 사람은 증거가 없을 때에만 강요하려 드는 것이다. 자기를 과신하지 말라. 강요당하지 말라. 

신학자들은 자연에 대해서는 눈뜬장님이고 그들이 어쩌다가 자연을 바라보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관찰할 줄은 모르니 말이다.

그대가 자양분을 찾아야 할 곳은 다름 아닌 현실 속이다. 벌거숭이로 굳세게 일어서라. 막이 찢어지도록 터뜨려라. 모든 후견인들에게서 떨어져라. 곧게 자라기 위하여 용솟음치는 수액의 충동과 태양의 부름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
(중략)
그대의 조상들이 먹고 소화한 것을 다시 먹으려 들지 말라. 아비의 그늘 밑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퇴화와 위축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는 듯이 플라타너스나 단풍나무의 날개 달린 씨앗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라.

고개 숙인 이들이여, 자 이제 고개를 들어라! 무덤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눈길이여, 고개를 들어라! 텅 빈 하늘을 향해서가 아니라 저 대지의 지평선을 향하여 일어서라. 굳세게 갱생하여, 죽은 자들의 악취가 진동하는 언저리를 박차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동지여, 그대의 발길이 가는 그곳으로, 그대의 희망이 부르는 대로 전진하라. 과거의 그 어떤 사상에도 매이지 말라. 미래를 향하여 몸을 던져라. 더 이상 시를 꿈의 영토 속으로 옮겨놓지 말라. 현실 속에서 시를 읽어내어라. 시가 아직 현실 속에 있지 않거든 그 속에 시를 심어라. 

나는 순간이 가져오는 것을 본다. 그 순간이 내게서 앗아가는 것을, 그리고 내가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생각해 본다. 뱃머리에 서 있는 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비유적으로 말해서 오직 광대한 공허뿐......

나는 다 살았다. 이제 그대 차례다. 이제부터 자네에게서 나의 젊음이 연장될 것이다. 내 그대에게 권능을 넘겨준다. 그대가 내 뒤를 잇는 것을 느낀다면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더 쉬울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희망을 건다.

동지여, 사람들이 그대에게 제안하는 바대로의 삶을 받아들이지 말라.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굳게 믿어라.

- 지드가 28세때 발표했던 '지상의 양식' 이후, 66세 발표한 '새로운 양식'의 도입부를 읽고 나서 혼란스러워졌다. 이 세상에서의 열렬한 삶에 대한 적극적인 작가의 태도가 신에 대한 문제와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이타성에 관한 문제를 일부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점점 읽어나감에 따라 '현실에의 인간 존재의 삶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하는 지드의 언어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 작품이 수년간의 노트를 바탕으로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모순된 작가의 글이 인간으로서의 의구심과 흔들림을 볼 수 있는 부분으로 내겐 받아들여진다. 흔들리며, 불안함을 가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열렬히 찬미하고, 맨발로 땅을 딛는 그의 글이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오늘도 이 창을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 있음을, 그 순간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음을, 그러한 순간을 선택한 나에게 용기를 주는 작품.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지드의 작품과 거의 동시에 읽었다. 그토록 서로 다른 접근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같은 가치를 이야기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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