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8일 수요일

'마지막 사진 한 장' 중, 베아테 라코타 글, 발터 셀스 사진

우리는 몇 주 동안 그곳에 있을 예정이었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카메라와 녹음기에 담으며 죽음을 체험하고 싶었다. 예전엔 누구나 어릴 때부터 죽은 식구들의 얼굴을 보며 자랐다. 죽음이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엔 고통과 죽음을 쉽게 외면할 수 있다. 죽음은 은밀하게 진행되고, 죽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희미해져 버렸다. 그래서 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략)
호스피스 병원은 이런 감정을 추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죽음을 볼 수는 있다. 양로원, 중환자실, 사고 현장...... 하지만 그런 곳에서의 죽음은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거의 일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호스피스 병원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현대 의학의 덕분이긴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마지막 시간을 최대한 고통없이, 가능한 한 맑은 의식 속에서 지낼 수 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작별을 고해야 하며, 삶을 정리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이 이제 곧 끝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우리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혹은 고통 속에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무엇도 위안이 되지 않는 사람들, 죽음과 무에 대한 두려움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우리는 인간이 참으로 모순된 존재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살날이 얼마 남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실제로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을 마주 본 순간에 솟구쳐 오른 감정의 힘은 예상치 못한 변화나 결심을 불러왔다. 한 노숙자는 호스피스 병원에 와서 술과 담배를 끊었다. 매일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하고 정성껏 머리를 빗었다. 그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한 후에야 그는 죽을 수 있었다.

매일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살인이나 전쟁, 자연재해에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너무도 자세하게 기록한 기사를 읽는다. 하지만 일상적인, 자연적인 죽음의 기사나 사진은 보기가 아주 힘들다.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자신의 종말을 너무 일찍 떠올리게 될까 봐 두려워서인지도 모른다. (중략)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에서 눈길을 돌리는 것보다는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오히려 죽은 사람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행동이 아닐까?


하인츠 뮐러 (71세)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이 아닌 것처럼. 개와 작별을 고하는 것이 그에겐 너무 힘겹다.


에델가르트 클라바이 (67세)
죽음은 아주 힘들 일이지. 빈말이 아니야. 죽음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그냥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거지. 정한 대로 되는 거야. 생명을 받았고, 그 생명을 살아야 했고, 이제 다시 반납하는 거지. 태어나 강보에 싸였다가 또 다른 덮개에 싸여 돌아가는 거야.

그래, 살아보지 못한 삶. 나 역시 그런 게 있어.

내가 죽은 후에도 누군가 내 눈동자에 담긴 그리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죽음은 졸업시험이야. 누구나 혼자서 치러야 해. 내 인생이 그러했듯 아주 조용히, 검소하게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인간은 죽은 순간까지 인간을 그리워하지. 사람의 체온이 필요해. 그렇지 않아?

이상하게 겁이 나. 너무 너무 무서워. 이렇게 신앙심이 깊은데도 말이야. 예전부터 나는 겁이 많았지. 통증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 결국 내 꼴이 이렇잖아. 그게 너무 슬퍼.


클라라 베렌스 (83세)
식욕이 떨어지면 끝난 거야.

죽음은 두렵지 않아. 어떤 상상을 하느냐고? 그냥 사라지는 거야.

그래, 다시 태어난다면 다른 인생을 살 거야.
하지만 또 한 번의 삶이 있을까? 난 없다고 생각해.


미하엘 라우어만 (56세)
그는 정말 멋지게 살았다.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그러느라 모든 관계가 끊어졌다.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과.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일도 두렵지 않다.


로스비타 파홀레크 (47세)
내세울 만한 게 없는 인생이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살고 싶지 않았고 자살 시도도 여러 번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여기 들어온 순간부터 미치도록 살고 싶어졌다.

"다들 영원히 살 것처럼 바쁘게 오가네요."


게르다 슈트레히 (68세)
딸은 어머니의 손을 쓰다듬으며 울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딸을 외면한다.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미하엘 푀게 (50세)
건강할 때 그는 한 번도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종양이 그의 언어능력을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코르티손이 도움이 된다면 의사의 판단이 옳았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이 인간다움에 가까이 다가가는 조용한 의학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겐 그런 의료진이 필요하다.


바르바라 그뢰네 (51세)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어요. 그게 너무 슬퍼요. 늘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쓰러질 때까지 죽어라 일만 했어요. 1년에 일주일 이상 쉬어본 적이 없었어요. 치료 센터가 웬만큼 자리를 잡아서 이제 좀 여유를 갖고 여행을 다니려던 참이었죠. 가르다 호수로, 추크슈피체 산으로. 하지만 그것마저 내 차지가 아니었네요.


볼프강 코트찬 (57세)
늘 삶만 생각했지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죽음을 기다려요.
하지만 남은 하루하루를 몸으로 체험하고 있답니다. 한 번도 구름을 쳐다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젠 모든 게 달라 보여요. 구름도, 꽃병의 꽃도...... 갑자기 모든 게 소중해요.

그날은 밤새도록 함박눈이 내렸다. 뇔커는 병원 문 앞에서 솜처럼 하얀 눈을 뭉쳐 큰 눈덩이를 만든 다음 허겁지겁 뛰어서 코트찬의 병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이 서서히 녹아 물이 되는 걸 지켜보며 물이 다시 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사라지는 것은 없다는 깨달음이었을 거예요.


베아테 타우베 (44세)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이겨야 해.
사방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애들에게 네가 필요해.
당시 막내 예시카는 세 살, 이자벨이 다섯 살, 멜라니가 열 살, 첫째 티에모가 열한 살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들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자문했다.
진정으로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자기가 어머니를 위로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자신을 위로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늘 무언의 비난이 공중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의술이 발달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요즘엔 죽음을 집중의학 및 하이테크 의학을 무기로 삼아 싸워야 하는 적군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 그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오래 산다. 그 대가는 통증과 구토, 쇠약,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동반한 채 몇 년씩 질질 끄는 중병이다.

지금도 여전히 고통의 기간이 불필요하게 연장되고 있다. 자비로운 죽음은 소생술로 저지되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겐 배를 뚫어 인공영양을 공급한다.
환자가 임박한 죽음을 준비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사들이 환자와 함께 기분 전환에 불과한 의학적 모헙에 뛰어든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을 거두는 그곳, 병원보다 더 죽음을 배척하려는 노력이 강하게 각인된 곳은 없어 보인다. 이곳의 의사들은 치유를 원한다. 따라서 죽어가는 환자는 실패를 의미한다. 그러니 치유의 장소에선 죽어가는 사람도 배척을 당하는 것이다.

- 이 책은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온 사람들의 생전과 사후의 모습의 사진들과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공장소에서 읽다가 울까봐 몇 번을 덮었다 다시 폈다. 그들이 내 친구이자 가족인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 사실처럼 변함없는 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외면받는 진리이다. 우리는 사는 동안, 우리도 죽는 다는 사실에 등을 돌리고 산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진짜 이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산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며, 옷장을 가득 채우고, 집을 꾸민다. 알 수 없는 미래에 투자하고, 현재를 잊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뒤통수를 친다. 아무리 죽음을 가깝게 보고 산다 할지라도 자신의 죽음은 예기치 못할 사건이며,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에 우리가 가장 잘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이지 않을까.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다를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회한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죽음을 전제한 우리의 삶을, 그때가 왔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어 가야 하는 것 같다.
더불어, 현대 의학 및 사회 풍조가 불러온 죽음에 대한 외면, 도피, 거부 등에 대한 각성이 (이 책에 언급된 대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병원에 들어선 순간, 인간은 존엄성을 잃은 하나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고, 마지막 시간들을 한 존재로서 충실하게 보낼 수 있도록 사회적인/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한 듯 하다.
지금은 너무도 쉽지만,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고, 말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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