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0일 화요일

레싱의 "다섯째 아이" 중

이 말을 듣고 헤리엇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불쌍한 벤. 아무도 좋아하지 않다니. 자신은 분명히 좋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좋은 아버지 데이비드 역시 그 애를 거의 만지지 않았다. 그녀는 동물 우리 같은 침대에서 벤을 들어올려 커다란 침대로 데려가 같이 앉았다. "불쌍한 벤, 불쌍한 벤" 그녀는 아이를 쓰다듬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그 애는 양손을 그녀의 셔츠를 잡아당겨 자신을 일으켜서는 그녀의 허벅지 위에 섰다. 딱딱한 작은 발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 그녀는 그 애를 쓰다듬으면서 자신에 대해 그 애가 부드러워지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녀는 곧 포기하고 다시 그 애를 침대 아니 우리 속으로 데리고 갔다. 눕혀졌다는 좌절감에서 벤은 울부짖었고, 그녀가 "불쌍한 벤, 소중한 벤"이라고 말하면서 두 손을 그 애에게 내말자 그 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을 끌어당겨 끙끙대며 일어서서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네달배기가...... 그 애는 성나고 난폭한 작은 괴물 같았다.

벤이 살해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여자, 그녀는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이렇게 격렬하게 자신을 옹호했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그녀는 벤을 그 장소에서 데려오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가족을 파괴했다. 그녀 자신의 인생에 해를 끼쳤다....... 데이비드의 인생...... 루크와 헬렌과 제인, 그리고 폴의 인생에도. 특히 폴의 경우가 가장 나빴다.
그녀의 사고는 이런 틀 안에서 맴돌았다.
(중략)
희생양, 그녀는 희생양이었다 - 헤리엇, 가정의 파괴자.

- 누구나 다 가정과 아이들을 생각할 때 그려지는 고정적인 모습이 있을 것이다. 밝고 따뜻하고 웃음이 넘치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헤리엇도 예외는 아니다. 식구가 많은 가정을 꿈꾸었던 헤리엇은 분수에 맞지 않는 큰 집을 사서, 남편 데이비드와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 나간다. 그러다 그들이 다섯째 아이를 갖게 되는 순간, 이 모든 고정적인 가정의 모습이 사라지게 된다. 
그들의 다섯째 아이, '벤'은 절대로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아이, 심지어 부모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부모가 두려워하게 되는 아이로 묘사된다. 원시인이 격세유전을 통해 다시 태어난 듯한 이 아이는 부모, 형제, 친척들로 외면받고 시설로 보내져 약물과다에 의해 곧 죽을 운명에 처한다. 그러나, 이 아이의 어머니인 헤리엇은 두렵지만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의 아이를 되찾아온다. 그녀의 결정으로 형제들과 남편, 그녀의 어머니, 그녀 자신의 생은 더이상 정상의 범위 돌아오지 못한다. 소통할 수 없는, 이해할 수도 없는, 더더군다나 사랑할 수도 없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 
이 소설은 우리가 가정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모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헤리엇.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되고 숨겨진 아이들. 이러한 가치관을 조장하는 사회. 
이러한 사회속에서 우리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절망과 아픔들을 꾹꾹 눌러담아 숨겨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사회에서 주입된 가정의 고정관념에 의해 가정에서의 당연하게 발생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밀폐시켜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사랑할 수 없음에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 꿈꾸지 않았음에도 인정해야 하는 것들을 이제 밖으로 꺼내서 서로 위로할 수 있다면,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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