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거울 속의 거울' 중

1.
미안해. 난 이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할 수가 없어.

아니, 네가 내 말을 듣게 되는 순간이 오기는 하는 걸까?
내 이름은 호르야.

하긴 설사 네가 이런 내 부탁을 받아들여 나에게 다가온다 해도, 너 스스로 감당해야 할 침묵은 여전히 넘치도록 남게 되겠지. 아무튼 내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에선 네 목소리가 필요해.

호르는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그 어떤 외침의 잔향들과 때때로 부딪히게 돼. 아니, 거의 항상 부딪히고 있다는 게 맞을 거야.

내 이름은 호르야.
나 스스로 호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게 맞겠지. 나 아니면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겠어.

나를 호르라고 불러 줘.
하지만 나, 호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는 오로지 단 한 명일까? 아니면 나는 둘이고, 그래서 그 두 번째 사람의 체험까지 나의 것으로 갖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저 수많은 사람은 아닐까? 그리고 '또다른 나'이기도 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저 바깥에서, 저 맨 마지막 벽 너머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희는 들을 수 없는 나의 말을 듣는가? 지금 들을 수 있는가? 아니면 시간이 없는 곳에서라면 들을 수 있겠는가? 또 다른 나여, 너 역시 나를 찾고 있는가? 너 자신인 호르를 찾는가? 나에게 있는 너의 기억을 찾고 있는가? 우리는 별과 별 사이만큼이나 무한한 공간을 한발 한발 서로 상에 사이 겹치면서 다가서고 있는 것일까?

5.
막은 여전히 오르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스스로 따져 보았다.  자신이 춤 출 준비를 하고 여기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을 혹시 사람들이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중략) 그러다 결국, 나에게 아무 연락도 없이 공연이 취소된 것은 아닐까? 혹시 내가 여기 서서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을 까맣게 잊고 모두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가 버린 것은 아닐까? 도대체 난 여기에 얼마나 서 있었던 것일까? (중략) 그렇다, 그는 침착하게 집중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를 향해 뛰쳐나가야 할지 그는 자신이 없었다.

언젠부턴가 그는 막이 열릴 거라는 믿음을 접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기다리는 데 열중하느라 자기가 왜 기다리는지조차 잊었다.

10.
행성이 도는 것처럼 천천히, 두꺼운 판자로 된 커다란 원탁이 돌고 있다. (중략) 이 모든 것들의 한가운데, 자기로 만든 작은 인형처럼 가냘프고 깨지기 쉬운 네가 앉아서 함께 돌고 있다.

"떨어지는 것을 배우라!"

그런데 뭔가 달라지고 있다. (중략) 너로 하여금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든 그 타인이 지금 머물고 있다.

"너는 자유롭게 되거나, 아니면 너는 존재하지 않게 될거야."

11.
눈을 감는다. 얼굴의 내부, 그밖엔 아무것도 없다.
어둠, 공허.
귀향.

여기 누군가 생각한다. 귀향을 위해, 나는 끝없는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을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중략) 대체 나는 무엇을 바랐던 걸까?
이제 집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것은 이 어둠과 공허뿐이다. 나는 미리 깨달았어야만 했다. 우리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야말로 이 세계가 존재하도록 자기 주변의 세계를 창조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13.
"아시겠어요? 난 이제 노인이에요. 그런데 난, 인생을 살아 본 적이 없어요. 모든 게 삭제돼 버렸다고요."

"그녀는 나를 찾게 될까? 저 너머 또다른 문 뒤에서......."

22.
이젠 여행에서 기대할 만한 최소한의 그 무엇도 없었다.
(중략) 이렇게 그는 수많은 비밀을 보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정작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에 대한 비밀은 거기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비밀을 찾지 못했기에 다른 모든 비밀도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한 임의의 형태에서 실로 놀라운 예술작품을 창조해낸 것은 결국 보는 사람의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온 힘이었을 것이다. (중략) 그의 창조적인 정신은 그 속에서 본질적인 것을 들여다보았고, 또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그 본질적인 것이 겨우 현실이 되었다.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침묵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럴진대, 왜 저를 슬프게 하려고 하십니까?"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수집해 과분하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4.
"그리고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가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요? 게다가 그 양쪽 끝이라는 게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중략) 도대체 무엇 때문에 광대는 그렇지 않아도 이미 불확실할 대로 불확실한 자신의 존재를 또다시 목숨을 건 게임에 내던지는 걸까요?"

25.
"당신의 향수를 잊어버리면 안 돼요. 이 여자는 당신한테서 모든 걸 앗아갈 거예요! 당신에게서 당신 자신을 앗아간다고요!"

29.
분장 아래 또 다른 얼굴 하나가 드러난다. 그것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아직 아무도 아닌 자의 얼굴, 그냥 그 무언가의 얼굴이다.  그것은 그에게도 아주 낯선, 항상 낯선, 그런 얼굴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을 견뎌 내고 있다면, 게다가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나보다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면....... 나는 내 평생을 두고 기다렸어. 그리고 깨어날 거란 기대 속에 늙어버렸지.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그냥 생각이 같은 걸로 치부하지.

깨어나려고 바라기만 해도 범죄라고 했지.

곧 깨어날 거라면 무서울 게 뭐 있나. 나 역시 꿈에 지나지 않아. 우스꽝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게 바로 나라는 존재야.

그는 한심할 정도로 방향감각이 없다. 그는 걷고 또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장님처럼 걷는다. 평생을 두고 걸어왔듯이 그가 걷는다. 
누구나 평생을 두고 걷는 거야. 다음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 다음 걸음이 계속 딱딱한 바닥을 밟게 될 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텅 빈 공간으로 빨려 들어갈지 모르는 채 말이야. 이 세상은 닳고 닳아 가고 있어.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새로 결심을 해야 해.

마치 세상 돌가는 것을 관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항상 조금씩 비틀거리며 왠지 머뭇거리는 듯,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그 머뭇거림을 극복하려는 듯 걷는다.

나라는 존재는 종잡을 수 없고 우스꽝스러워. 하지만 다른 것을 선택할 자유로운 결정권이 지금까지 한 번도 나에게 주어진 적이 없어. 인간에겐 현재 자신의 모습만 의미가 있지. 자유는 언제나 미래 속에만 있는 거야. (중략) 나중에 보면 일어난 일은 모두 필연이지만, 일어나기 전까진 그 무엇도 필연이 아니지. 오로지 문제는 꿈에서 깨어나는 거야.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의 꽁무니만 쫓아서 달리고 있어. (중략) 언제나 다음 순간에 있고, 언제나 미래에 있어. 그리고 미래는 어두워. 우리 눈앞에 놓인 뚫고 나갈 수 없는 검은 벽이야. 아니, 미래는 우리 두 눈 가운데를 세로로 가르며 지나가고, 우리 머리를 가로로 가르며 지나가. 우리는 눈이 멀었어. 미래 앞에서 눈이 먼 거야.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것을 결코 보려고 하지 않아. 우리는 코가 깨지기 전까지 결코 다음 1초를 보지 않지. 우리는 우리가 이미 본 것만 봐. 그러니까 그건 결국,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는 얘기야. 아무것도.

꿈꾸는 사람이 깨면 그 꿈은 어떻게 되는지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고요? 그러면 꿈꾸던 사람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요? (중략) 우리는 모두, 그 누구도 꿈꾸지 않은 단 하나의 꿈일까요?

30.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저기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는 거."

"그러니까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 문을 지키느냐고?"


- 미하엘 엔데의 30편의 단편과 그의 아버지의 초현실주의 그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거울 속의 거울'. 미국에서 절판된 책이 너무 비싸 망설이고 있다가 한국어 번역판을 보고 바로 사서 하루에 읽어내려간 책. 그러나 그 무게가 너무도 무거워 하루를 쉬고, 다음날 그의 다른 단편, '자유의 감옥'을 모두 읽고, 오늘 '거울 속의 거울'로 다시 돌아왔다. 결코 쉽지 않은 그의 상상.
두 거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의 무한한 반복, 그 마지막 반복을 구별해내기조차 불가능한 실재하지 않는 상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엔데는 현실이 더이상 현실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그러나 너무도 현실의 어떤 모습과 닮아 있어 이에 대한 인식과 의미를 던진다.
문, 시간, 광대, 들리지 않는 목소리, 보이지 않는 장면, 꿈꾸지 않는 꿈, 목적없는 기다림, 의미없는 반복 등의 초현실적인 그의 소설이 그토록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현실의 어떤 면과 너무 닮아서인 듯.
그의 소설은 '시작'이다. 그의 소설에 '끝'은 없다. 시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지고, 생각을 불러 일으키고, 용기를 촉구한다. 무엇하나 정해진 것, 분명한 것은 없고, 이 끝없는 미로 속에서 '존재의 실재'조차 확실치 않을 때, 그는 타성에 젖은 삶을 버리고 어디론가의 '도약'을 요구한다. 그 도약이 어디로 어떻게 이끌게 될 지는 그도, 나도,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이 단편들에서 엔데는 철학에 신비함의 옷을 입혀 우리 눈 앞에 들이댄다. 볼 수 있는 것은 각자의 몫일 뿐, 마치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공, '호르', 가 들려지지 않는 내면의 목소리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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