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장석주의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중

<검은 오버>

검은 오버를 입고 산책길에 나선다
골목길을 빠져나오며
나는 검은 오버가 무겁다고 느낀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의 죄가 아니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가 항상 너무 많은 말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 속에 수천 평의 추억들이 아우성치기 때문이다
검은 오버는 번개다
검은 오버는 빈 들판이다
검은 오버는 컹컹 짖는 밤의 개다
검은 오버는 내 속에 질척거리는 진눈깨비 내려치는 길이다
검은 오버는 알 수 없는 목마름으로 괴로워하던 
청춘의 한때
증오의 대상이던 아버지다
이제는 온갖 병치레를 하며 졸아든 아버지다

검은 오버에는 창문을 흔드는 바람이 들어 있다
검은 오버에서는 건초 냄새가 난다
검은 오버에는 오래전에 죽은 자들의 다문 입이 숨어 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검은 오버를 즐겨 입었다, 늦은 밤에
귀가하는 아버지의 검은 오버의 어깨에는 
별들이 함부러 묻어 있곤 했다, 아버지는
검은 오버를 사랑했다, 검은 오버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는 내게 이르시기를
인생을 낭비하며 살지 말아라,
검은 오버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거라,
검은 오버는 내 인생에 유익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검은 오버가 싫다
검은 오버는 너무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누른다

<'후생' 중>

금생은 미혹이다, 미혹의 삶을 허물어
길을 만든다. 길은 어둠 속에서 수천 갈래의 길이 된다.
허공에서 우는 봉두난발의 한 넋이 있어
이천 년 후에나 올 애인을 기다리며
흙이 되어, 바람이 되어, 강물이 되어
길을 헤매이리라.
낮게 웅크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대가 남긴 것은
무르팍에 몇 개의 아문 흉터,
부디 다음 생에서는 만나지 말자.
더 이상 덧날 상처는 만들지 말자.
흐르는 물 위에 쓴 편지를
몇 겁 뒤에 읽을 애인이여,
나는 벌써 끊은 한 모금의 담배를 빨고,
남은 생을 주저 없이 어둠 속으로 던진다.

<'슬픔' 중>

누가
울음의 타는 끝을 보아라
온 산을 불지르는 진달래 철쭉꽃 같은
슬픔의 내 넋에 타는 불을 보아라
슬픔도 그렇게 타며 움직이는 슬픔만 와라
깃발처럼 천년 풍우에 헐벗은 깃발처럼
지금도 살아 펄럭이는 슬픔만 안겠다

<'나의 시' 중>

1
희망
모든 가난한 사람의 빵이 아니듯
나의 시는
나의 칼이 아니다. 
캄보디아나 아프리카 신생 공화국 같은 곳에서
빈혈의 아이들이 쓰러져 가고 있을 때
백지의 한 귀퉁이에
얌전히 적혀 있는 나의 시는 
나의 칼이 아니다.

2
내 생각의 서랍을 열면
그 어두운 구석에 숨겨져 있는
추억이라는 오래된 빵에
파랗게 피어 있는 곰팡이,
먹어서 허기를 면할 수도
갈아서 무기로 쓸 수도 없는 
그것이 나의 시다.

<등에 부침>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 뛰어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들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따.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 나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 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으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 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등이 한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
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폐허주의자의 꿈' 중>

3
무너진 것은
무너지지 않은 것의 꿈인가? 
어둠은 산비탈의 아파트 불빛들을 
완벽하게 껴안음으로 아름다워진다.
살아 더도는 내 몸 어느 구석엔가
몇 번의 투약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몇 마리 기생충,
그것이 나를 더욱 나답게 하는 것인가?
효용 가치를 상실하고 구석에 팽개쳐져 
녹슬고 있는 기계, 이 세상에 꿈은 있는가?
녹물 흘러내린 좁은 땅바닥에
신기하게도 돋고 있는 초록의 풀을
폐기 처분된 기계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가?


- 장석주의 시는 조용하나 높은 파고를 가진 밤바다의 밀물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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