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9일 수요일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 중

나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요컨대, 의미니 이유니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야말로 이 동굴 세계에서 교양 있고 깨인 그림자로 인정 받는 지름길이었다.

시간이 변화를 뜻한다면, 실제로 이곳엔 시간이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었다. 단지 일정한 형체 없이 끝없이 반복되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이곳의 시간은 흡사 걸쭉한 죽과도 같아서, 끊임없이 저어 줘야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만약에 손을 떼면, 언제 움직였냐는 듯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려 이전과 이후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들에게는 순간만이 있을 뿐이야 .진짜 노예만도 못한 노예, 진짜 죄수만도 못한 죄수가 바로 그들이야.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노예, 갇혀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지 않는 죄수......

이브리는 대답하고 있었다. 그리도 다른 그림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지금 베히모트가 하는 말은 진실이 아니라고...... 왜냐면 저 바깥에 우리들이 원래 살았던 세상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잠시 망설였다.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스라임의 동굴' 중>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아마도 끝없는 알파벳의 사슬 중간쯤에 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그 사슬이 끝이 없다면, 어디쯤 와 있는지를 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 사이 나는 입구에서 한없이 멀어지기만 했다. (중략) 나는 이 여행 내내 뒷걸음질만 쳤다. (중략) 단지 한 과제의 자리에 그 이전의 과제가 맞물려 있을 뿐이다.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 중>

우리는 갇혀 있다네, 스스로 선택하라는 선고가 내려졌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수없이 많은 불확실성 중에
어떻게 인간은 모든 것을 아는 듯이 결정할 수 있는가
미래가 어떨지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을
그것을 안다 해도 이미 한 발은 묶여 있는 것을
왜냐면 모든 것은 정햬져 있기 때문에

모든 불신은, 결정할 수 있는 힘도 없이 뭔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고통 속에서 싹틉니다.

자유의 감옥에 맞선 끊임없고 황당한 싸움은 나를 이렇게 소진시켰습니다. 나는 더 이상 희망을 갖지도, 두려워하지도, 무엇을 위해 애쓰지도, 무엇에 대해 기뻐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문들에 대한 나의 관심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문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자유의 감옥' 중>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라는 게 그들에겐 혼란스럽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그래서 어서 깨어나고만 싶은 꿈이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달갑지 않은 낯선 세계에 유배되어 그 안에 머물도록 단죄되었다고 느낀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향수에 빠져, 지금의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현실'만을 그리워한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요?"
(중략) "나는 그 의미가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중략) 삶에 대한 희망과 의식을 버리면 사는 게 얼마나 수월해지는가를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미련 없이 버려라! 알겠나!"
이 대화 이후, 마토에게는 변화가 생겼다.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언제나 그에게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까닭 모를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간혹 그 슬픔은 잠시 뒤편으로 물러서기는 했어요, 그를 완전히 떠난 적은 한시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그가 투토 에니엔테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면 되새길수로, 그 그림자는 조금씩 거두어지고 있었다. 전혀 새로운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 새로운 감정을 그는 자유의 가벼움이라 여겼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공허의 가벼움이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그는 다시 한번 이름을 바꿨다. 옛이름은 과거의 인생과 함께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신을 '길잡이'라는 의미의 '인디카비아'라 칭했다.
사람들이 이 이름의 뜻을 물어 오면 그는 습관처럼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길잡이 노릇을 하는 이정표는 비바람에 부서지고 썩기까지 해서, 그 자체론 아무 가치도 없는 나무 한 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나무 토막은 자신의 몸 위에 무엇이 씌여 있는지 스스로 읽을 수 없다. 설사 그것을 읽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안내하는 그 목적지에는 결코 가볼 수도 없다. 하긴 자신이 세워져 있는 그곳에 머무르는 게 그의 존재 목적이기도 하다. 이정표는 자신이 가리키는, 바로 그 목적지만 빼곤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으며, 그곳이 어디든 그의 가치는 충분히 발휘될 수 있다. 목적지야말로 이정표가 아무 쓸모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유일한 장소인 것이다. 그리고 인디카비아 자신은 지금 자신이 안내하려는 그 목적지에 있는 게 아니므로, 그 길을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말이다.......

존재 자체가 더 큰 사기이며 허상인데 그 속에서 무얼 더 속이고 말고 한단 말인가?
<'길잡이의 전설' 중>


- '자유의 감옥'은 그의 다른 단편집 '거울 속의 거울'과 같은 철학적 물음들을 제시하고 있으나 공간적인 주제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엔데는 우리가 매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이 공간의 정형성과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공간을 뛰어넘는 어떤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 속의 공간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그 속성이 극대화되어 묘사되고 (모든 것이 반복되는 동굴, 선택의 문에 갇힌 자유의 죄수, 목적지를 지향하는 이정표 등), 이 공간을 극복하여 더 고차원적인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떤 미지의 공간 (현실적 굴레를 벗어낫 철학적 사유의 자유로서의 공간)으로의 도약을 종용한다. 그 공간에 대한 정의나 실마리는 없으나, 그는 마치 자신을 '길잡이'로 묘사한 그 이정표처럼 어떠한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가 가리키는 초현실적 공간으로의 이동을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인식, 반복의 안락과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깨는 용기, 선택한 것을 추구하는 집념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그 이후에 그 공간에 도달해서는? 그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미지의 공간이며 그 스스로 말한 것처럼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은 이정표가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진부한 현실에 안주하며 미스라임의 동굴의 그림자처럼 매일을 반복하며 존재의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한번은 꿈꾸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상상력의 대가가 철학적 질문을 던질 때, 안이한 삶을 불편하게 휘젓는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