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7일 금요일

카뮈의 '최초의 인간' 중

여기서는 쓸데없는 것들마저도 가난했다.
(중략) 그는 항상 죽음처럼 헐벗은 가난의 한가운데서, 보통 명사들속에서 성장했다. 반면에 삼촌댁에 가면 고유 명사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이었다. 그는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1905년 그의 아버지는 스무 살이었다. (중략) 르베스크 씨는 아버지와 동시에 징집을 당했다. (중략) 코르므리와 르베스크는 협로의 저 아래에서 보초 교대를 하게 되어 있었다. (중략) 그는 목이 칼에 찔려 있었고 납빛으로 부풀어오른 채 그의 입 안에 물려 있는 것은 그의 성기였다. (중략)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저자들은 잘못이야. 사람이라면 차마 그렇게는 못 해." 그 사람들로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슨 짓이듯 못 할 게 없다 "무엇이든 다 때려 부술 수 있다"고 르베스크가 대답했다. 그러나 코르므리는 미친 듯이 성을 내면서 고함쳤다. "아냐. 사람이라면 그렇게 못 하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나서 그는 이윽고 마음을 진정했다. "난 가난한 사람이야. 나는 고아원 출신이지. 이런 옷을 입고서 전쟁에 끌려 오긴 했어도 나는 못 할 짓은 안 해." "못 할 짓을 하는 프랑스 사람들도 있어." 하고 르베스크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도 사람이 아니지."

"그 사람이 뭐라 그랬어요?" "앙리가 죽었어. 전사한거야." 뤼시는 봉투를 바라보기만 할 뿐 열어 보지 않았다. 그녀도 어머니도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중략) 덧문들을 닫은 다음 침대 위에 누워서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눈물도 없이 자신은 읽을 수도 없는 봉투를 주머니 속에서 꼭 거머쥔 채 어둠 속에서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불행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응 하고 대답했지만 아니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 파묻힌 기억을 뚫고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아무것도 분명한 것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기억은 벌써 부자들의 기억만큼 풍요롭지 못하다.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 떠나는 적이 거의 없으니 공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고 그게 그 턱인 단조로운 생활을 하니 시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었다. (중략) 따라서 말없는 체념을 강요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녀로서 인생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한계도 없는 영토 위에서 경계도 없는 시간 동안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빛과 하늘의 광대 무변한 공간 속에서 정신이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자크는 자신이 세상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부자라고 느겼다.

그것은 아름다움 앞에서 약해지는 마음 바로 그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초등 교육 수료반 때 그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베르나르 씨는 어느 한 순간 그 아이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 위하여 그의 인간적 무게를 송두리째 실어서 힘을 썼고 또 실제로 그 운명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오직 학교만이 자크와 피에르에게 그런 기쁨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학교에서 그토록 정열적으로 좋아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의 집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가난과 무지로 인하여 삶이 안으로 닫혀 버린 것처럼 더욱 견디기 어렵고 더욱 음울했으니까 말이다. 가난이란 출구가 없는 요새와 같은 것이다. (중략)
그렇다, 학교는 그들에게 단순히 가정 생활로부터의 도피 장소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베르나르 선생님의 반에서는 적어도 학교는 어른에게보다는 아이에게 훨씬 더 근원적인 내면의 굶주림, 즉 발견에의 굶주림을 채워 주고 있었다. (중략) 제르맹 선생님의 반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자신들이 가장 높은 배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른들은 그들이 나름대로 세상을 발견해 나갈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선생님은 단순히 그가 월급을 받고 가르치도록 되어 있는 것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 속에서 그들을 단순 소박하게 맞이하여 주었으며 그들과 함께 그 삶을 살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과 그가 사귀었던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자신의 사상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그는 예를 들어서 당시 많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반 교권주의적인 입장이었지만 교실에서 단 한 번도 종교에 대하여, 또 어떤 선택이나 신념의 대상이 되는 것이면 어느 것에 대해서나 절대로 비방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도둑질, 밀고, 무례함, 불결 등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그만큼 더 강하게 배쳑했다.

자크는 15년 전부터 매년 그를 찾아가 보곤 해왔다. 매년 찾아가 오늘처럼 문간에 서서 그의 손을 잡은 채 가슴 뭉클해져서 서 있는 그 늙은 남자에게 떠나기 전에 작별의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더욱 더 큰 발견들을 하라고 그를 정든 땅에서 뿌리뽑아 그 무거운 책임을 혼자 다 짊어지고 바깥 세상으로 나가도록 내몬 사람이 바로 그분이었다.

"이 고장 분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여기선 아무것도 그냥 두는 게 없어요. 때려부수고 새로 짓지요. 미래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 모든 세대의 사람들, 서로 다른 고장에서 지금은 어느새 황혼의 기미가 떠오르는 이 기막힌 하늘 아래로 찾아왔던 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를 안으로 닫은 채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들 위에는 엄청난 망각이 드리워졌다. 사실 이 땅이 베풀어 주는 것은 바로 그것, 다가오는 어둠으로 죄어드는 가슴 속에 고통만 가득 안고 마을 가는 길로 다시 접어든 그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밤과 함께 내려오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중략)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또 그의 집에서는 아무도 어머니가 남을 위해서 일한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우선 그의 아이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크는 그 표현을 써넣기 시작하다가 멈추었고 갑자기 수치심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수치심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또 수치스러워졌다.
아이란 그 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부모가 그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는 부모에 의해 규정된다. 즉,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규정되는 것이다. (중략) 그 같은 상황 속에서 그나마 의지할 모질고 졸렬한 자존심 뿐이었으므로 흔들림 없는 글씨로 서류에다가 <하녀>라고 써가지고 그런 것에는 별로 주의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복습 교사에게로 시치미를 떼고서 갖다 주었다. 그렇게 하고서도 자크는 결코 자기 집안의 형편이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비록 절망적으로밖에 사랑할 수 없다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도대체 한 가난한 아이가 아무것도 부러워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때로는 수치스럽게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숱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묵묵 부답인 가장 초보적인 도덕관만 갖추고서, 태양과 바다 혹은 가난이라는 무심한 신들의 보호를 받으며, 매일같이 현재의 삶이 너무나도 무궁무진해 보이는 바람에 미래의 삶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하느님이 외면하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로 자라고 있었다.

훗날 그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은 권리를 존중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오직 힘 앞에서만 머리를 숙인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어머니는 다정하면서도 건성인 키스로 응해 주고 나서는 박명속의 그 부동 자세로 되돌아가 자신이 앉아 있는 언덕의 저 발 아래서 지칠 줄도 모른 채 흘러가고 있는 삶의 흐름과 거리 쪽으로 지칠 줄도 모른 채 시선을 던지고만 있었고, 아들은 목이 컥 막혀 오는 것을 느끼면서 지칠 줄도 모른 채 어둠 속의 그녀를 쳐다보면서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불행과 대면한 채 불안 가득한 눈으로 구부리고 있는 그 메마른 등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집을 향해 돌아올 때면 언제나 다시 느끼게 된느 미지와 죽음 앞에서의 고통 하루가 저물 무렵에면 어느새 빛과 대지를 파먹어 가는 어둠과 같은 속도로 그의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그 고통은

그들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뭐든지 다 알고 싶었다. 그들은 잘 쓴 책이건 험하게 쓴 글이건 상관하지 않았고 오직 글의 내용이 알기 쉽게 분명하게 쓰여 있고 격렬한 삶으로 가득 차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책이야말로, 아니 그런 책들만이 그들에게는 머리 밑에 고이고 무거운 잠을 자도 될 만큼 근거가 있는 꿈을 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책은 한 권 한 권마다 인쇄에 사용된 종이에 따라 섬세한, 혹은 은밀한 그 나름의 냄새가 있었다.

도대체 그 동네라는 것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한편 여자들, 그리고 카트린 코르므리로 말하자면 끊임없이 일만 했다. 그 이유인즉, 그들에게 휴식이란 모든 식구들에게 돌아가는 식사가 더욱 가벼워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엇다. 그 무엇도 보상해 주지 않는 실직은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재앙이었다.

실질적으로 자크에게 있어서 긴긴 여름은 어둡고 광채 없는 날들과 무의미한 일거리로 닳아 없어져 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잖아" 하고 할머니는 말했었다. 바로 그 사무실에서야말로 자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느낌이었다. (중략)
그러나 사무실에서 하는 그 일은 어디서 온 것도 아니고 어디에 이르는 것도 아니었다. 팔고 사는 것은 모두가 그 보잘것없고 미미한 행위들 주변을 맴도는 것이었다. 비록 지금까지 가난 속에서 살아 왔지만 자크는 그 사무실에서 천박함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발견했고 잃어버린 빛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중략) 하루의 나머지 시간에 그들은 저마다 자기 껍질 속에 웅크리고 들어앉아 있었고 (중략)
그들을 기다리는 집 쪽으로 돌아서서 혼이 깃들이지 않은 노동과 불편한 전차 속에서의 기나긴 왕래 그리고 그 끝에 찾아오는 급한 잠 사이에 나누어진 그 삶에 체념한 채 조용히 땀을 흘리면서 말이 없었다. 어떤 저녁 나절에 그들을 바라보노라면 자크는 항상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 그는 오직 가난의 풍부함과 즐거움밖에 몰랐었다. 그러나 더위와 권태와 피로는 그에게 가난의 저주를, 끝도 없는 단조로움의 날들을 너무 긴 동시에 너머 짧게 만들어 놓는 저 눈물겹도록 멍청한 노동의 저주를 드러내보이는 것이었다.

으르렁대는 젊은 피, 삶에 대한 탐욕스런 갈망, 사납고 굶주린 지성을 가슴에 품고, 광란하던 즐거움은 낯선 세상이 그에게 가하는 돌연한 펀치에 번번이 끊어져 당황스럽기 그지없지만 곧바로 정신 가다듬고 알 수 없는 그 세상 이해하고 알고 동화하려 애쓰며, 슬그머니 빠져 나가려 애쓰는 법 없이, 결국은 언제나 태연한 확신 버리지 않고, 자신만만, 그렇지, 자신만 가지면 원하는 건 무엇이나 이룰 수 있으니까, 이 세상 것이라면 이 세상만의 것이라면 어느 것 하나 불가능할 건 없으니까, 선의를 가지고, 치사하지 않게, 세상에 다가가므로 과연 그 세상을 동화시켜 가며, 그 어떤 자리도 욕심 내지 않고 오직 기쁨과 자유로운 인간들과 힘과 삶이 지닌 좋은 것, 신비스러운 것, 결코 돈으로 살 수 없고 사지 않을 모든 것만을 원하기에 도처에서 제자리에 있으려고 준비를 하는(그리고 또한 어린 시절의 헐벗음에 의하여 준비가 되어 있는) 그의 삶은 그러하였다. (중략)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존재의 알 수 없는 어떤 몫도 있었다. (중략) 그 깊은 물처럼,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더 그 무엇이 또한 있는 것이었다. (중략) 그리하여 그 빽빽하고 알아차릴 수 없는 파동으로부터 아직도 그의 내면에서는 매일매일 마치 그의 사막 같은 고뇌, 가장 비옥한 향수, 헐벗음과 소박함에 대한 돌연한 욕구, 무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처럼 가장 격렬하고 가장 무시무시한 그의 욕망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는 맹목적인 인내의 차원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의 무지한 삶을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건설했고 창조했고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나의 날들은 넘치도록 가득 찼었지만 그 무엇도 내 마음을 그처럼 가득 채우지는 못했다.

나를 떠밀어 준 것은 우선 내가 예술에 대하여 품어 온 엄청난 생각, 아주 엄청난 생각이다.
내게 있어서 예술이란 모든 것 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은 그 누구와도 분리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카뮈의 자서전과도 같은 미완의 소설, '최초의 인간'을 읽은 감회는 남다르다. 오랫동안 읽고 싶었으나 절판된 책이라 중고의 책을 이번 한국 방문에서 구했을 때 매우 기뻤다. 우연히 이 감상이 100번째 포스트가 된 것도...
이 소설은 미완일 뿐더러 거의 초고의 형태도 갖추지 못한 상태의 글들을 그의 딸과 편집자가 정리해서 그의 사후 34년이 지난 뒤 펴낸 것이다.

그의 첫 생각이 글로 고스란히 드러난 것을 읽는 것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 그토록 풍요롭고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것에 대한 묘사는 너무도 생생해 마치 살아있는 카뮈가  이야기라도 해주는 듯 했다. 생계를 위한 노동에 대한 그 본질적 숭고함과 따라다니는 무의미함에 대해 그보다 더 잘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난과 불운 앞에서 어찌 해 볼 수 없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그의 어린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린 시절 숨막히는 노동의 반복에 질식할 듯한 자신을 발견하고 그 밖으로 뛰쳐나갔음에도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그 모든 정의와 열정을 자신의 삶과 글로 승화시켜 나갔다. 그의 위대함은 현실을 직시하고도 타협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연대를 가지고, 글에 대한 열망과 정의를 순수하게 지키며 살아갔다는 점이다. 그가 말했듯이 그의 예술이 그의 삶과 분리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글을 자신의 삶 속에서 꺼내어 아직도 뜨거운 피를 흘리는 따뜻한 진실을 들이댔다.

아버지의 기억이 없는, 무명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자식들인 자신은 (혹은 우리 자신은), 아마도 이 땅의 '최초의 인간'이 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으로도 남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망각된 생에 대한 그의 연민은 그러한 모든 사람을 그 뿌리를 가지지 못한 '최초의 인간'으로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으로부터 얻은 아버지에 대한 편린의 기억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일지언정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포기하지 않았던 전쟁에 징집되어 죽어간 20대의 아버지), 어느 귀통이 이름이 적힌 작은 묘석, 어머니의 슬픈 등 돌린 모습에서 주워 들은 아버지의 부재에의 존재 등은, 카뮈가 자신을 '최초의 인간'으로 규정하기 이전에 그의 아버지가 '최초의 인간'이었으며 그 이전에 죽어간 평범하지만 존엄한 인간들의 삶을 '최초'로 규정하여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음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미완이고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의 몫이리라. 그러나 이 책이 없었다면 놓치고 말았을 카뮈의 진정한 어린 시절의 모습들에 가슴이 저미고 공감하면서, 시대적 불행과 가족적 불운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빛나는 추억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그를,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 그를 (숫자가 의미를 가진다면) 그리고 미래의 카뮈를, 치열하게 기억하고 싶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