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7일 월요일

카뮈의 '작가 수첩 3' 중

어떤 날 저녁에는 그 감미로움이 끝나지 않은 채 오래 이어진다.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도 땅 위에는 이런 저녁들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면 죽는 데 도움이 된다.

'세심하다고 해서 한 인간이 위대해지는 건 아니다. 위대함은 맑은 날처럼 하늘의 뜻에 따라 찾아오는 것.'

한 순간이 지나자 그 문장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진동했고,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나는 심지어 최악의 도덕적 과오의 순간에도 명예에 대한 관심을 결코 버릴 수가 없었는데 금세기가 도달한 극도의 타락을 목도하면서도 나는 용기가 없었다.

나는 시민권이 없는 존재다.

이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챔피언들로서 저주의 안락한 진지 속에 파묻혀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하면 술책을 일삼는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장차 쓸 나의 책들은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책들이 시대에 복종하기보다는 시대를 스스로에게 복종시키기를 바란다.

40세가 되면 사람은 자신의 한 부분이 소멸되는 것을 용납한다. 다만 다 쓰지 못한 이 모든 사랑이 지금 나로서는 감당할 힘이 없는 한 작품을 일으켜 세워 빛나게 해주기를 하늘에 빌 뿐.

끊임없이 자기들 몫을 내놓으라고만 한다. 그들은 나의 정력이 무진장이라고 여기는지 자기들에게 내 힘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살아가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기진맥진할 지경인 창조의 정열에 나의 모든 힘을 바쳐버렸기에 그 밖의 것을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헐벗은 자이다.

지칠 줄 모르는 개떼들 같은 어둠.

일본으로 가는 말로에 대하여 V.R. 부인이 하는 말. "그는 그곳으로부터 돌아오기 위하여 그곳으로 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는 때가 오는 것이다.

보클뤼즈. 저녁의 빛은 술처럼 섬세하게 금빛을 띠며, 때로는 가슴에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 저 고통스러운 수정들을 천천히 녹인다.

내겐 실질적인 시간이 없습니다. 특히 마음내키는 대로 친구들을 만나고 지낼 내면적 여유가 없습니다. (중략)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내 책들을 쓸 시간과 내면적 여유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입니다. (중략) 그 동안에도 삶은 여전히 계속해야 하고 작업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은 계속되고, 나는 어떤 아침이면 소음에 지치고, 끝도 없이 계속되는 작업에 기가 꺾이고, 아침에 자고 깨면 신문 속에서 넘쳐나는 세상의 광기에 기진맥진한 나머지, 그리고 결국 나 한 몸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것임을,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을 다 실망시키고 말 것임을 확신하 나머지,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고만 싶은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더러는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이타주의는 쾌락처럼 하나의 유혹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한 대가를 자연스럽게 지불할 것.

니체: <새벽>. '자기 자신의 생각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절대로 묵과하지도 말고 숨기지도 말라. 이는 그대가 그대의 생각에 대하여 지켜야 할 으뜸가는 신의이다.'

고독의 불가능에 대한 희곡.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다.'

나를 섬뜩하게 하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 사는 것이다.

나는 포석이 깔린 널찍널찍한 큰길들을 좋아한다. 벽들 못지않게 빈 공간으로 건설한 도시. 나는 니체가 일을 했고 나중에는 광기의 발작을 일으킨 비아 카를로 알베르토 6번지에 있는 집을 보러간다. 나는 오베르베크의 도착, 미쳐버린 니체가 광란하고 있는 방안으로 들어갈 때, 그리고 울면서 오베르베크의 품안으로 달려드는 니체의 행동을 전하는 이야기를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의견들은 없고 당파심들만 있다. 자유주의자는 거의 없고 가난과 그것의 이용, 그리하여 조금씩 조금씩 어떤 무기력 속에 빠진다.

사람은 누구나 다 최초의 인간이며 아무도 최초의 인간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을 되찾아야겠다. 나는 힘이 필요하다. 삶이 손쉬운 것이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삶이 어려운 것이라면 나도 그것에 버금가는 힘을 갖고 싶다.

최초의 인간.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에, 혹은 그저 상당히 비슷한 상황에서라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했던 것이기에 그 자신도 그렇게 했던 모든 일을 생각하노라면, 결국은 그것이 쌓여서 하나의 삶을 이루게 되는,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던 그 삶을 이루게 되는 그 모든 것을 -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을 택하여 살 줄 몰랐기 때문에 결국은 죽고마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던 그 삶을 이루게 되는 그 모든 것을 생각하노라면.'

내겐 직업이 없고 오로지 소명받은 천직이 있을 뿌니다. 그리하여 나의 일은 외로운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값하는 인물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자기들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는 이 사람들 앞에서 나는 쓸쓸한 기분에서 헤어날 수 없다. (심지어 그들이 자신의 일에 불평하고 있을 때조차 나는 카뮈가 느꼈던 그 쓸쓸한 기분과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나' 때문에 나는 그들의 삶과 같은 삶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델로스와 신트가 리니아 뒤로 차츰 차츰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의 슬픔과 너무나도 흡사한 묘한 슬픔을 느낀다. 처음으로 나는 내가 죽기 전에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고통스러운 느낌과 함께 내가 사랑하는 땅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바다와 섬들 위에는 다시 변화하는 색깔들. (중략)
이 군도를 떠나는 절망감. 그러나 절망감 그 자체도 좋다.

나는 내 삶이 끝날 때 산 세폴크로의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 그 길을 천천히 따라 내려가고 싶고 여린 올리브 나무들과 키 큰 사이프러스나무들 사이로 걷고 싶고, 두꺼운 벽들과 서늘한 방들을 갖춘 어느 집에 저녁빛이 골짜기로 내려 덮이는 광경을 좁은 창문으로 내다볼 수 있는 아무 장식없는 방 하나를 얻고 싶다. 나는 아레조에 있는 프라토 공원으로 돌아가서 저녁에 요새 위의 소로를 산책하면서 이 비길 데 없는 땅 위에 밤이 덮여오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그리고 또...... 어디에 가나, 언제나 나 자신도 영문을 알 수가 없는 이 고독에의 욕구, 마음을 가다듬고자 하는 내밀한 심사와 더불어 일종의 죽음의 예고와도 같은 이 고독에의 욕구.

시대를 불행의 시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평탄한 시대라기보다는 그들의 악덕의 안전이다.'

햇빛이 사치인, 은행구좌가 없으면 나무도 없는 곳인 파리. 세계에 교훈을 주겠다는 파리.

때때로 나는 내 주변에서 나와 같은 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에 대하여 엄청난 애정을 느끼곤 한다.

이 세상에는 죽음이나 강제의 힘과 나란히 작동하고 있는 거대한 설득의 힘이 한 가지 존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나는 이제 어떤 관계도 견디지 못한다. 어찌나 맹렬히 자유를 갈구하는지 점점 더 고독만을 찾게 되는데 고독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끊임없이 F. 생각을 한다. 걱정이다.
저녁. 나 자신 때문에, 황량한 사막 같은 내 천성 때문에 낙담한 채로.

불교란 종교로 변한 무신론이다. 허무주의로부터 '출발한' 거듭나기.

켈라Cayla를 방문하다 : 고독하고 조용한 그곳 주위로 세계가 와서 죽는다.

행복 자체 속에서도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끊임없는 노력을, 이 공허한 고행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하여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이 부름을 포기해버리고만 싶은 유혹은 강하다.

29일에서 30일로 가는 밤 : 끝도 없는 고뇌.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을 하지 말 것.

물 속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억누르기 어려운 충동.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배의 뒤, 성난 물결 한가운데 버려진 인간의 고독.

지배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주기 위하여 가장 큰 힘을 회복해야 한다.

진실 속에, 진실을 위하여 산다는 것. 우선 자신의 실제 됨됨이의 진실. 사람들을 대할 때 구성하는 것을 포기할 것. 존재하는 것의 진실. 현실을 가지고 꾀를 쓰지 말 것. 그러므로 독창성과 그 무력함을 받아들일 것. 무력함에까지 그 독창성에 따라 살 것. 그 중심에서는 마침내 존중받는 존재의 무한한 힘을 가지고 하는 창조.

나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같이 살지 못한다. 나는 약간의 고독이, 영원의 몫이 필요하다.

바람이 뿌리고 바람이 거두었지만 그래도 창조자인 것, 수세기에 걸쳐서 단 한 순간을 사는 것이 자랑스러운 인간은 그런 것이다.


- 많은 책 들 속에서 카뮈의 글만큼 '진실'을 울리는 것은 없는 듯하다. 그의 글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신의 진실에 와서 박힌다.
그의 30대 후반에서 47세의 죽음까지 쓰여진 노트. 카뮈는 일찍 알려진 성공한 작가이고, 마흔 네살에 노벨상을 수상한 당시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작가로서 얼마나 그보다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의 작가 수첩은 많은 고뇌의 흔적들이 엿보인다. 특히 노벨상 수상 이후 그의 고뇌는 더 무거워진 듯 하다. 일반 사람들과 점점 멀어져가는 듯한 괴리감, 오해받는 그의 입지와 글들, 진실로 위대한 작품 창작에의 욕구 등이 그의 병약한 신체와 더불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다. 이 노트가 없었다면 우리는 카뮈에 대한 많은 부분들을 놓치고 말았으리란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의 죽음에 대한 낭만적인 희망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짧은 노트를 통해 그의 죽음이 어떠했으리라는 생각을 그려 볼 수 있다. 그가 니체의 광기어린 아파트의 생을 머릿속에 그려봄으로써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듯이 카뮈의 어린 시절의 장소들, 티파샤, 지중해의 군도, 그리스, 이태리의 작은 마을 들을 들리게 된다면 분명 눈물이 솟구치리라.
그토록 집요하게 진실을 원했던 카뮈, '나의 직업은 책을 쓰는 일과 나의 가족, 나의 민족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는 싸우는 일이다. 그것이 전부다.' 라고 말했듯이 글로써, 그가 이 세상을 얼마나 진실되게 사랑했는지 언제나 이방인으로서 느끼면서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연대감과 연민을 가졌었는지 지금의 삶에 용기와 의미를 주는 위대한 사람이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돌을 굴려 올린 시시포스와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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