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중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마흔일곱이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니까.

길고 여윈 얼굴에 피로한 눈빛과 애써 지은 냉소적인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는 이제 아무에게도 편지를 쓰지 않았고, 누구에게서도 편지가 오지 않았으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할 때 사람들이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던 것이다.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번째 파도에.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중>


스스로의 표현대로 '체면과 품위와 명예에 대한 사랑'이 일시적인 사랑이었지도 모른다는 것은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아내만 없었다면 오래 전에 외교관직에서 물러나 이탈리아의 어촌에 가서 살았으리라는 사실이었다.
<'류트' 중>

그들은 고속도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스팔트가 눈에 젖어 그들의 발아래에서 반짝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부르크까지 육십오 킬로미터가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왔다. 노인은 글자를 힐끔 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거의 다 왔다" 하고 그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이애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이애는 환자랍니다. 이애의 부모는 죽었고, 이 가엾은 어린것에게도 불행이 닥쳤지요. 오!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군인들이란 다 그러니까,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지요. 하지만 그 일은 이 어린 것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지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사의 말대로 심리적인 실명입니다. 이애는 세상에 대해 눈을 감아버린 거지요. (중략) 문제는 그때 이후 이 어린것이 모든 것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린 겁니다. 다시 말해서 두 눈을 자기 내부에 가두어버린 거죠.

우리 인간들은 말이죠.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겨우 출발했을 뿐이니까,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정말 어떤 존재가 될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표지판이 나왔다. 남자는 고개를 내밀고, "함부르트, 백이십 킬로미터"라고 씌여진 표지판을 읽었다. 그는 서둘러 안경을 벗었다. 놀라움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벌어진 입은 다물 줄을 몰랐다. 그 서툰 운전사는 그들을 반대 방향으로 육십킬로미터나 더 멀리 데려다놓았던 것이다.  (중략)
"가자"하고 남자는 쾌활하게 말했다. "이제 다 왔단다."
<'지상의 주민들' 중>


- 로맹 가리의 16편의 단편. 로맹 가리라는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또다른 필명인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낸 '자기 앞의 생'이라는 책에서였다. 그 책에서 주인공의 슬픈 운명을 필연적으로 사는 천진한 소년의 목소리에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운명이라는 커다란 굴레 아래서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의 모습을 약간은 희극적으로 시니컬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지상의 주민들'이라는 단편에서는 인간 스스로 서로에게 만들어 낸 비극 속에서 상처받은 인간이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가두어버리고, 그럼에도 부조리한 희망 (다가가려할수록 멀어지는 희망)으로 걸어가는 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로맹 가리는 사람의 어떠한 부분이 가장 아픈지 글의 손톱으로 정확히 찔러 대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흉터를 헤집어 눈 앞에 들이댄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인간임을, 내밀한 상처를 안고 받고 살아가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자살로 마감했던 그의 생, 운명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너무도 컸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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